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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지금 간절한가

박은영 승인 2019.03.29 17:23:49 호수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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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만에 그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어.
“나, 너무 외로워...”
그 말에 내 가슴이 서늘해졌어.
나의 외로움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의 외로움에게 빠르게 대답했어.
“나도 외로워...”
세상을 사는 우리는 모두 외로워.

삶이 그렇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덜컥 주어질 때가 있고, 죽어라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지만, 반면 불안감도 크다. 현실이 녹록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거나 좌절하며 산다. 살아내는 것이 너무 버거워 대충, 가볍게, 쉽게 삶의 무게를 덜어내려 하고, 멀리 있는 꿈보다는 가까이 있는 현실을 택한다. 가슴은 간절하다 말하지만, 몸은 세상을 쫓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를 만나도 늘 외롭고, 무얼 해도 늘 허기져 있다. 몸은 채워져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갈색으로 변해 있었어. 붉었을 텐데. 백일홍이라 하더라고. 그 꽃. 백일 동안 붉었었대. 지금은 시드는 중인가 봐. 그런데도 슬퍼 보이지 않았어.
“너 웃고 있네?”
“응.”
“왜지?”
“곧 내 필연이 올 거거든.”
“어떻게 알아?”
“약속했거든.”
“그걸 믿어?”
“그럼. 필연인걸.”
꽃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어.
“난 여기서 내 필연이 오기를 백일 동안 기다렸어. 백일이 지나면 오겠다고 했거든.”
“하지만 넌 지고 있는 걸...”
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어.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난 정말 행복했어. 난 우리가 함께 할 날들을 상상했지. 그날을 그리는 동안 난 정말 아름다웠어. 내 손은 붉게 물들었고, 내 발은 초록으로 굳건했지. 백일을 하루같이 설레고, 두근거렸어.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열심히 잎을 키워 나갔어. 그러다 보니 모르는 사이, 커졌고 강해졌지. 이제 예쁜 거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성숙한 꽃이 되었어. 모든 것이 운명이 되어 버린 거지.”
“하지만 그가 와도 너는 곧 죽을 텐데...”
“괜찮아. 대신 내가 이번 생을 이렇게 순하고 아름답게 살았잖아. 누구나 찬란한 시절은 짧아. 누구나 영원히 예쁘진 않아. 나는 내 필연으로 인해 비로소 활짝 필 수 있었어. 꽃잎 떨어지기를 수십 번 한다 해도 이제 영원히 살 수 있는 힘이 생겼어. 내 몸은 일 년을 살지만, 내 영혼은 영원을 살아. 그를 내년 봄, 다음 생에 또 만날 테니. 그가 내가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를 기다리며 행복했던 기억은 영원할 테니.”
백일홍은 시들었어도 그 어떤 꽃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웠어. 아름다움이란 시간을 곰삭고 익히면서 물들어지는 거지. 곰삭고 익으면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겨. 미래를 꽉 잡은 자신감에서만 우아한 아름다움이 생겨. 그것은 겉모양이나 지위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 아니야. 마음속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고 행하는 노력에서 얻어지는 고귀함이지. 운명을 지켜나가는 것은 진정 아름다운 모습이야.

운명은 인위적인 목적성이나 우연이 배제된 필연성을 갖는다. 그것은 간절했던 꿈이거나 절절히 원했던 사랑 일 수 있다.
욕망이 가득 찬 불안정한 세상에서 간절함을 갖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를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별 하나쯤은 간직해야 되지 않겠냐고 절규한다. 어떤 이는 동화 같은 낭만이라고, 어떤 이는 뭐 그렇게까지 힘들게 사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이제껏 변변치 않았거나 아직 오지 않았다고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운명이 운명대로 되지 못하는 건, 모두 우리 욕심 때문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 실망할까 봐 기대하지 않았고, 실패할까 봐 도전하지 않았고, 적당히 안정된 길을 가고자 했던 우리가 놓쳤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욕심 때문이다.
진리는 가장 원초적인 순리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갈망하는 무언가는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힘이 된다. 고단한 인생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된다. 행복 씨앗이 말랐을 때 다시 싹틔우는 인큐베이터가 된다.
간절함이 돈과 명예를 가져다주지 못할지 모르겠다. 어떤 경우는 더 큰 부를 가져다줄 수도 있겠다. 비록 풍족함을 준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도,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확신한다. 이 세상 살만하다, 는 만족감. 적어도 세상 유혹에 딸려가지 않고,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만족감. 우리가 죽도록 노력해도 세상에서 제일 부자는 될 수 없지만, 간절한 것을 위해 올곧게 한 길을 걸어가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될 수 있다.

잠시 세상 소리를 끄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자.
멀리 떨어져 보면,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것들은 작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열정은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에 대한 지독한 편애다. 간절한 것에 대한 지독한 편애. 그 편애 안에서 세상 관객은 무색해진다.
수많은 군상들이 얽히고설킨 인생숲에서 길을 잃고 외롭지 않으려면, 우리 간절한 걸 쫓자.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변명이 보인다고 했던가. 간절하면 방법이 보인다. 결국 어떤 일의 성사는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간절한가에 달려있다. 능력도 간절함에서 나온다. 시간은 절박함을 메우는 과정이고, 결과는 간절한 시간들의 합이다. 소망으로 단단해진 세월을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 이길 수 없다. 내가 단단하면 나를 흔드는 주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간절함을 믿어라. 믿어야 멈추어진 심장이 다시 뛸 수 있다. 우리,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되자. 뜨겁게, 간절하게, 사무치게.
그대, 지금 간절한가.
간절한 시절이 내 생의 화양연화다.

- 박은영 글 그림 <밤과 여름사이의 맛> 중에서

박은영 작가

●아리디(R.ed) 대표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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