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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남지은 승인 2019.04.01 09:33:41 호수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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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에 선 존재는
자기를 망친 결벽을 떠올린다
아는 손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손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로부터
사랑하지 않는 자로부터
일상의 머리채를 더듬더듬 건져 올리기까지
사랑도 되고 폭력도 된다는 머리통을 깨부술 때까지
안도 되고 밖도 되는 곳이 있다
낮도 되고 밤도 되는 때가 있다
괜찮아? 춥지 않겠어? 다정한 물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하기 좋은 순간이 있다
조명이 어둡거나 테이블이 조금 흔들린대도
있잖아 하고 시작된 이야기가 그건 있잖아 하고 이어진다
옆 사람의 옷이 내 어깨에 걸리고
옆 사람의 말이 내 것처럼 들려서
옆 사람의 손에서 기울어진 찻잔같이 내 몸도 옆, 옆, 옆으로
기우뚱거리고
쏟아져도 괜찮아
낙관도 포기도 아닌 말이 마음에 닿기도 한다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난간을 벗어나

출처 :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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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나란히 놓을 글을 쓴다. 시의 첫 줄부터 설명을 덧붙여야 할까, 그러기 전에 이 시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 말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부터 소개해야 할까. 말을 고르는 중에 불현듯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저쪽을 바라봤다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나는 테라스에 앉아 있다. 비 떨어지는 소리, 차 지나는 소리,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 사람들의 끊어지는 말들…… 어제 본 축구 이야기, 여행 계획을 세우는 들뜬 목소리, 통화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여기서 친구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은 적이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날도 출근을 서둘렀어. 아파트 입구를 막 나서는데 퍽 하고 둔중한 소리가 났어. 처음 듣는, 그러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어. 몇 초의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렀고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누군가 신고 전화를 했어.” 친구는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일보다 무서운 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음 날이 찾아온다는 거였다고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과 후의 자신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때 나는 팔을 뻗어 친구의 손을 잡았던가. 시간이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진다. 분명한 건 친구의 말이 내 것처럼 들렸다는 것. 어떤 경계에 선 것 같은 순간,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뒤섞이는 순간, 안과 밖이 뒤바뀌는 순간을 우린 때로 목도하며 살지 않는가. 내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그릇의 파편처럼 내 마음에 날아와 박힌,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깊숙이 남아 있는 어떤 목소리. 어쩌면 시인은 그것을 수신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마음이란 몸을 굽혀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테라스」라는 시도 그런 경계, 그런 순간 속에서 들려왔던 거 같다.

*

까무룩 잠들었다 깼을 때 주변이 어둑했다. 아직 저녁인지 아니면 새벽인지 알 수 없었다. “뭐 해?” 하는 문자가 친구한테서 와 있고 며칠 기다리던 업무 메일도 들어와 있다. 늙은 개를 침대에서 내려주니 물도 마시고 밥도 좀 먹고 볼일도 본다. 내가 깨어나길 한참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인데 요즘 꿈이 많다. 깨어나면 마음 먹먹한 기억나지 않는 꿈이다. 달아나는 꿈을 내버려 두고 얼마 전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아이들의 글을 본다. 열여덟 살, 이제 막 고 2가 된 아이들이다. 공부, 진로, 입시, 꿈, 가족, 돈, 아르바이트, 다이어트, 부담감, 삶, 월요일이 찾아오는 것, 나 자신, 죽음, 매일매일…… 이 많은 고민 중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도울 수 없는 일을 어쩌자고 아이들 마음에서 꺼내온 건지 아이들 마음을 헤집은 건 아닌지 생각한다. 답장할 수 없는 아이들 마음을 붙들고 멍청해진다.

같은 나이에 같은 고민을 했을 또 다른 아이가 자꾸자꾸 떠오른다. 가족들을 통해 그 아이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게 몇 년 전의 일이다. 죽은 소년이 곁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게 몇 년 전 일이다. 비가 세차게 오던 날, 국화꽃이 놓인 아이들 책상을 바라보던 게 몇 년 전 일이다. 몇 년 전 일도 십몇 년 전 일도 손안에 떨어진 꽃잎처럼 느껴진다.
시간도 꿈도 우릴 통과해 가고 우린 4월의 한복판에 다다르고 있다.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질 뿐일까. 흐리고 춥지만 꽃은 피고 봄이구나 안심할 수 있다.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다는 한 아이의 고민에 퍽 웃음도 난다. 어쩌면 많은 것들이 자고 일어나는 사이 달라지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 시는 깃들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에 띄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남지은 시인
●2012년 『문학동네』로 등단

남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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