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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낭독회에서

김상혁 승인 2019.05.02 16:21:22 호수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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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고 있던 게 아니라, 방금 그것을 차고 지나간 사람이 내 친구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짐승이나 사람에겐 좀 더 친절하면 좋겠네, 생각했다.
꽃이 아름답다, 별이 아름답다고 쉽게 말하는 친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한다.
식당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게 아니라, 방금 말을 마친 입속으로 들어가는 물과 밥이 튀지 않았으면 좋겠네, 생각했다. ‘사람이 꽃이라고? 그따위 생각, 학교에서 배웠어?’ 친구에게 심하게 따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한 유명 작가의 낭독회에 갔었다. 젊은 유명 작가 주변에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 낭독이 시작되기 전 매우 아름다운 독자가 꽃을 선물했다. 꽃을 보고 있던 게 아니라, 독자가 건넨 그것이 오랫동안 말라가는 작가의 서재를 생각했다.
단상 앞에서 두 여성은 힘껏 포옹했다. ‘꽃이 대단히 향기롭네요!’ 저런 말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꺼내다니 과연 작가로군, 생각했다. 그리고 길고 지루한 낭독이 시작되었지만, 독자를 친구처럼 대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백 투 소설의 한 구절, ‘젊음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겹고 길었다’는 부분에서 꽃을 건넸던 여성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기서 눈물을 보고 있던 게 아니라, 눈물을 머리까지 밀어올린 어떤 용기와 애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꽃이 아름답다, 별이 아름답고, 그래서 모든 게 아름답다, 아무도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낭독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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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생각한다. 시인이란 신비를 보고, 진리를 말하는 자라고. 하지만 대상의 본질을 관조하는 자, 진리를 아는 자, 신이 입술을 빌린 자와 같은, 시인에 관한 저 낡고 과장된 관념을 모독으로 여기는 현대시인이 적지 않을 것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아직도 친척 어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어째서 시인이 산과 꽃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따진다. 반은 장난이겠으나, 나는 그런 말이 또한 절반 정도는 진심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의 신비에 대한 감상을 묻는 가족 앞에서는 오히려 마음이 완악해진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이런 식으로 대답하기도 한다.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뇨? 그런 것은 없습니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풍광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다만, 모두 함께 소와 돼지를 배 터지게 먹고 나오는 길에, 나에게 문득 그런 걸 물어보는 방식을 견딜 수 없을 뿐이다.

요즘 시는 복잡하고 어렵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왜 이리 시를 어렵게 쓰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시처럼 쉽게 쓰면 좋을 텐데, 하는 의견도 자주 접한다. 그냥 꽃이 아름답다, 별이 아름답고, 그래서 모든 게 아름답다고 쓰면 좋을 텐데, 하는 말도 종종 듣는 편이다. 교과서에 실린 시가 정말 쉬운가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누군가 말하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쉬운 말로 이야기하는 시인’은 내가 아는 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시는 복잡하고 어렵다. 이는 당연하게도, 우리의 일상이 옛날에 비하여 말도 못 하게 복잡하고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훌륭한 시인과 별 볼일 없는 시인을 나눌 수 있는 기준 같은 게 존재할리는 없지만, 산이 좋고, 바다가 아름답고, 그래서 그런 자연을 닮은 인간이 따뜻하다는 시를 쓰는 사람이 현재의 문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클래식음악이나 미술을 즐기고 감상하는 데 진입장벽이 있다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시에 관해서는 난색을 표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야말로, 우리의 철학과 삶을 근본적으로 반영하는 언어를 도구로 삼고 있기에, 시대정신을 가장 치밀하게 담을 수밖에 없다. 현대적 일상이나 철학을 수용하지 않는 시인, 그리하여 여전히 자연이 아름답고, 그 자연 속에 사는 사람이 최고라고 말하는 시인이라니, 지금, 21세기에 말이다. 시는 더는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가정의 중심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여성은 꽃이다, 남성은 슬퍼도 울지 않는다…… 등등. 대신 이런 것을 말한다; 아버지는 가부장의 상징성을 독점할 수 없다, 모성애란 어머니 개인의 욕망이 아닌 사회체계의 욕망이다, 여성을 꽃이라고 부르는 자는 도태되어야 한다,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남성은 한 번쯤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다…… 등등. 전자처럼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에, 현대시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런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뭘 어쩌라는 거지 싶다. 다만, 이 지면, 이 코너는 나 이전에도 다른 작가들의 시를 실었고, 앞으로도 이런저런 시를 거듭 소개할 것이다. 나의 바람은 시인들이 단순히 어려운 말장난을 하고 있다거나 자기들도 모르는 말로 멋을 부리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받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나 즐거움과 말하지 않는 시, 어쩌면 절망과 고통만이 가득한 시가 당신의 손에 들렸을 때, 이유도 없이 그저 속이 배배 꼬인 냉소주의자들이군, 하고 당신이 오해한 채로 책장을 넘겨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인은 그저 지금이라는 시대의 바깥에서는, 여기라는 일상을 벗어나서는, 어떤 그럴듯한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위에는 아버지가 딸의 가슴을 열매에 비유하는 시,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자기 삶을 포기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시가 적혀 있다. 또 거기엔 주말에 산에 올라갔더니 꽃이 아름다웠고, 사람이 아름다웠고, 그래서 모든 게 아름다웠다는 시도 여전히 적혀 있다. 그리고 그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살았던 시인도 자기 시에 옮기기 주저했던, 낡고 유치하기 짝 없는 감수성이다.

 

 

 

 


김상혁 시인
●2009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김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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