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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김혜주 승인 2020.01.02 13:52:37 호수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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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 되면 변호사로 일한 지 햇수로 8년이 된다. 이 글이 게재되는 것은 2020년이겠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2019년 연말이다. 지난 일들을 되짚어 보기에 적절한 시기란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6개월의 실무수습 기간을 보내고 법정 출석이 가능해질 즈음, 주변의 선배변호사님들은 술자리에서 초년차 변호사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어차피 이길 사건 이기고 질 사건 지는 것”이라는 말이었고(아마도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길 바란다는 취지였을 것으로 이해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재판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라는 말이었다.

사무실에 있는데 당시 대표님께서 외국인보호소에 가서 의뢰인을 만나보라고 전화를 하셨다. 급히 찾아간 외국인보호소는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났고 아담한 교도소 같은 느낌이었다. 안내받은 접견실에서 의뢰인을 기다리면서 티브이에서 봤던 조선족의 이미지를 떠올려봤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주 건장한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치며 들어왔다. “대한민국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대한민국을 대변하러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 억울함에는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뢰인을 진정시키고 확인해야 할 사항을 하나하나 물었다. 보호소로 올 때 절차적 하자는 없었는지, 의뢰인의 조상 중 대한민국 국민이 있는지, 문제된 형사사건의 구체적 정황은 어떠한지, 혼인관계, 가족관계, 국내에서의 직장 생활 등등.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의뢰인의 조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향인 경북 영덕에 거주하다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주로 이주하여 의뢰인의 부(父)를 낳았고, 의뢰인도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2008년경부터 의뢰인과 의뢰인의 처 및 나머지 친척들은 모두 국내에서 체류하며 생활기반을 갖추었다. 2014년경 의뢰인은 출입국사무소에 찾아가 체류기간 연장을 하려 하였는데 출입국사무소는 돌연 그 자리에서 의뢰인에게 수갑을 채운 후 보호소에 구금하였고, 7일 이내에 출국하라는 강제퇴거 처분 및 보호 처분을 하였다.

처분의 이유는 의뢰인이 받은 형사 판결 때문이었다. 의뢰인은 피해자가 의뢰인의 절친한 친구의 처의 내연남이라고 오해하였다고 한다. 우연히 술자리 옆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피해자가 의뢰인의 멱살을 잡으면서 폭행이 오갔긴 하였으나 술자리에서 우발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피해자와 호형호제를 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형사사건이 진행되면서 피해자와는 150만 원에 합의를 하였고, 의뢰인이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자 피해자는 깜짝 놀라 항소심에서 사건의 경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피해가 크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강제퇴거였다. 출입국관리법상 규정에는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강제퇴거 처분을 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유죄의 형사 판결 전력이 있으면 예외 없이 쫓겨나고 있었다.

보호 처분의 집행정지는 기각이 되었고 의뢰인이 보호소에 있는 이상 내가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의뢰인과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처와 친척, 의뢰인의 직장 동료들로부터 탄원서를 받아서 제출했다. 그 사이 의뢰인의 고용주는 몇 번이나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더 도울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달라고.

술자리에 갔다가 우연히 우리 사건의 재판부가 변경이 되었고 재판장님은 형사사건을 하던 분인데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대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써두었던 준비서면을 열고 좀 더 자극적인(?) 단어로 바꾸고 비록 형사 판결이 있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형사사건과 다른 시각으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출입국관리법에서 행정청의 처분에 관하여 폭넓은 재량권을 인정하는 취지는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여 보다 타당한 행정행위를 하게 하려는 것임을, 행정행위의 재량권이 행정청의 결론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호소했다.

승소였다. 판결문에는 출입국관리행정은 주권국가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기는 하다고 하면서도 의뢰인의 형사사건의 구체적 정황을 언급하며 의뢰인의 이 한 차례의 범죄행위만으로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매번 보호소 접견실에서 만나던 의뢰인을 사무실에서 보게 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밤새 서면을 쓰며 머리를 싸맸던 사건, 도저히 사실관계를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건, 치열하게 다투었던 사건을 이겼을 때보다 이 사건을 이겼을 때 나는 가장 좋았다. 무엇을 쓸까 하다 이 사건이 생각난 걸 보면 나는 아직도 의뢰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아마추어 변호사인가 싶다.

김혜주 변호사
●법무법인 화인

김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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