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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강江

황적화 승인 2020.03.02 14:46:19 호수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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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과거 26년간 법관으로 재직하다가 사직하고 변호사가 된 지 어언 7년이 되었다. 머리가 희끗하게 되어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들이 아득하다. 보람도 허물도 많았던 긴 세월 동안 가끔씩은 두 줄기 강물을 생각하였다.

 

__________깊 은 강__________

법관의 인생을 한시로 표현한다면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지라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의 구절이 어울리지 않을까. 한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지조를 간직하면서 항상 자기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한 자세로 ‘참’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

판사 시절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을 마치고 늦은 밤 법원의 현관을 나설 때마다 아직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많은 창문들을 바라보면서 동료들에 대한 존경심에 가슴이 뜨거웠다. 법관의 주된 일과는 ‘고민하는 것’이다. 타인의 생사존망을 판가름하는 결론을 내야 하는 법관은 사건 하나하나마다 무엇이 진실인지, 법을 어떻게 해석적용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고뇌하지 않는 법관은 기도하지 않는 성직자와 같다고 하겠다. 과거 종신직 자리를 훌훌 떨치고 고향인 뉴햄프셔의 시골집으로 돌아간 데이비드 수터(David Souter) 미연방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판사가 하는 일은 흐르는 물줄기 속으로 아주 빨리 가라앉고 마는 것이며, 판사는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그 거대한 물줄기의 일부가 되는 것에서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즉, 승진이나 돈이나 명예욕에 휘둘리지 말고 주어진 작은 사건 하나하나에서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 것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대사처럼 수터 대법관은 인상 깊은 짧은 말을 남기고 표표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절정의 내공이 아니면 따라하기 어려운일이다.

근래 우리 사법부에도 파란곡절이 많았지만 공명심이나 출세욕, 물욕 등은 장강의 물줄기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법관들에게는 덧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는 바닷물 같은 것이 아닐까. 비바람 속에서도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르는 법이다. 필자는 처음 판사가 되었을 때 수시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깊은 생각 없이 함부로 법관직을 지망한 것이 아닌가 평생 번민하였다. 세월이 흘러 법복을 벗을 때 너무나 홀가분했었지만, 막상 변호사가 되어보니 더더욱 직업적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법조인의 숙명이라 하겠다.

그래도 스스로 심혈을 기울여 고뇌를 거듭할수록 세상의 고통은 조금씩 더 줄어들 것으로 믿고 노력하는 선후배 동료법조인들의 모습은 나의 스승이다.

 

__________깊 은 강__________

오랜 세월 재판을 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당사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은 대부분 잊었지만, 사건 속에 담겨 있던 사랑과 이별, 대립과 화해, 오해와 진실 같은 것들은 낡은 시집 책갈피에 꽂아놓은 단풍잎처럼 내 가슴속에 길이 남았다. 특히 허름한 간이역의 풍경처럼 저마다 애절한 사연을 안고 시름에 잠겨있던 당사자들의 고단한 짐꾸러미를 풀어헤쳐 살펴볼 때면 내 마음에도 하염없이 싸락눈이 내리곤 했다.

그런데, 나는 과연 현명한 법관이었을까? 스스로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저 거짓 없이 최선을 다했노라는 생각 한 토막이 겸연쩍게 남았을 뿐이다. 더 나아가 ‘너는 따뜻한 법관이었느냐’라고 묻는다면 불현듯 반성하는 마음이 깊어진다.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이었고 암흑의 시대에 빛나는 등불이었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중략), 만약 친절히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다. 매년 초 변협에서 발표하는 법관 및 검사 평가에서는 좋은 사례도 많지만, 너무나도 거칠고 험악한 일부 판검사의 언행 또한 알려지고 있다. 필자도 법정에서 그런 살벌한 광경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 그들은 왜 좀 더 부드러울 수 없는지, 권력에 터 잡은 우월감의 발로인지, 왜 친절의 가치와 미덕을 모르는지 답답할 뿐이다.

필자가 과거 사법연수원 교수직을 마감하고 떠날 때 나이먹은 값을 하느라 제자들과 석별하는 자리에서 간곡히 당부하였다. “부디 겸손하고 따뜻한 법조인이 되거라”.

누구든지 똑똑함만이 두드러지기보다는 지혜롭되 어진 마음과 인내심을 겸비한 법조인으로부터 재판이나 수사 또는 변호를 받고 싶어 할 것임은 분명하리라. 그런 뜻에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남긴 글 중 다음의 한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가을 강은 맑으나 부드러워 (秋水之淸淸而柔),
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 강과는 다르네(不如氷江不可舟).

이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곧고 바르며 엄정한 기개가 있되, 늘 주변에 따뜻한 사랑과 덕을 베푸는 모습은 실로 맑고 고요한 가을 강과 같다(반면, 얼어붙은 겨울 강은 굳세기는 하되 인간미 없어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인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남은 삶의 길들을 가을 강처럼 흐르고 싶다.

 

황적화 변호사
●법무법인 허브

황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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