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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의 눈물

이유진 승인 2021.01.05 13:12:16 호수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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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려고 집어 들 때마다, 살면서 마셨던 가장 비싼 생수였던, 안데스의 눈물이 생각난다.

2019년 2월, 법학전문대학원의 친구들과 남미로 여행을 갔다. 우리는 2018년 여름부터 조별 과제처럼 엑셀로 여행 일정을 짜고 항공권을 예매했으며, 여행 중 각자의 역할을 분담(회계, 숙소 및 남미 내 비행기 예약, 나라별 가이드 등)하고, 남미사랑 카페 등에 가입하여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했다. 우리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다들 ‘정말 남미를 가기 위한 모임이구나’ 하며 싸우지 않을까 걱정했더랬다. 얼굴 익숙해지자며 주 1회씩 점심을 함께했는데도 공항에서 처음 말을 놓은 친구들도 있었을 정도로 의외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거의 5주에 가까운 여행이어서 마지막엔 다들 지쳐 얼른 귀국하고 싶어 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유쾌하고 즐거웠다. 아직도 다들 남미에 다시 가고 싶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돌이켜 보면 5주 내내 즐거운 일만 있던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아무래도 같이 여행 간 사람들이 다들 착하고 긍정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웃어넘기며 추억거리로 만들어 주는 친구들이어서 안 좋은 일도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나는 칠레의 가이드 역할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계획을 짜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7명의 여행이다 보니 알찬 일정을 만들고 싶었다. 여행을 즐겁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맛있는 음식이 아니겠는가. 매일 전날 밤 숙소에서 트립바이저에서 현지 맛집을 검색해 놓곤 했다.

안데스의 눈물을 맛본 장소도, 현지에서 유명한 맛집이었다. 우리는 시청 부근을 구경하다 택시를 타고 맛집으로 이동했다. 누가 봐도 관광객의 복장이었던 우리는, 처음에 화려하게 정장을 빼입은 남녀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이런 옷으로 들어가도 되냐며 걱정을 하다가 들어갔다. 다행히 복장으로 제지 받지는 않았고, 7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안내되었다.

거대한 송어구이, 굴 등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리소토, 볶은 모둠 해산물, 연어구이 등을 시켰고, 메뉴의 가격은 미리 검색했던 대로 아주 훌륭했다. 목이 말랐던 나는 종업원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con gas? sin gas?(탄산수? 그냥 물?)”

친구는 탄산수를, 나는 그냥 물을 청했다. 잔에 따라진 물이 제공되었다. 목이 말랐던 나는 물을 단번에 마시고 더 달라고 청했다. 한 잔 따라진 병이 제공되었다. ‘WATER FROM THE ANDES MOUNTAINS’라고 쓰인 병이었다. 마침 얼마 전 안데스 산맥에서 떨어진 빙하를 맛보았던 참이라, 신이 나 “안데스 산맥의 물이래! 미네랄 워터라고 쓰여 있어. 역시 고급 식당은 다르네. 물이 수돗물도 아니고 몹시 고급스럽게 생겼네.”하며 마셨다. 한 친구가 약간 걱정하며, “이거 서비스가 아니라, 다 돈 내고 마시는 물일 거 같은데…….”라고 말했고, 해외여행을 별로 안 다녔던 나는 “설마 식당에서 돈 내고 물을 마시라는 거겠어…? 돈 내고 마시는 거면 탄산수도 병째 줬어야 하는데 한 잔만 줬는걸. 돈 내도 뭐 생수가 얼마나 하겠어.”라고 답했다. 친구도 “하긴 한 잔만 주는 건 이상하긴 해. 뭐 돈 내고 마시면 되지.”하고 넘어갔고, 우리는 흡족하게 메뉴를 맛보았다. 다들 땡볕에 오랜 시간 걸어 목이 말랐던 터라 탄산수 한 잔과 그냥 물 9병을 마셨다.

나는 가성비 좋은 훌륭한 식사였다고 뿌듯해하며,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물값이 음식값만큼 나왔다는 사실을. 고급 생수였던 것이다.

한 잔 마신 탄산수도 1병 값이 청구되어 있었다. 비싸 봐야 에비앙 정도 가격이겠거니 했는데 한 병에 만 원 정도 하는 물이었다. 가성비 좋은 식사라고 생각했는데, 물값을 더하니 평범한 식사가 되어버렸다. 나 혼자 한 식사였으면 웃어넘겼을 텐데 7명의 공금으로 하는 식사인데 이렇게 돈을 낭비해 버리다니, 정신이 아찔했다.

같이 여행하는 친구들에게 매우 미안해서 “물값은 내 사비로 낼게.”라고 말하는데, 친구들이 “우리 같이 물 마신 건데, 무슨 소리야. 공금 처리해야지. 그리고 맛있어서 좋았는걸. 훌륭한 식당이었어.”라며 넘겨 주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우리가 마신 게 안데스의 눈물이었네, 이제 안데스의 눈물이라고 부르자.”, “한 사람당 만 오천 원 정도 더 낸 건데, 그 돈으로 안데스의 눈물이라는 추억을 샀으니, 난 만족해. 웃긴 에피소드가 생겼는걸?”, “크, 이런 비싼 물 언제 마셔보겠어~”라며 달래주었다. 친구들이 괜찮다고 아무리 말 해줘도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는데, 저녁에 마트에서 와인을 살 때마다 “유진! 우리가 마신 물보다 싼 와인이다! 안데스의 눈물은 당해낼 수 없지~”, “역시 칠레는 물보다 와인이 싸네.”라며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쳐 주니 그제야 진짜로 웃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나의 실수로 돈을 낭비한,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는데, 친구들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긴 셈이다, 돈을 주고 즐거운 경험을 얻었다’며 웃어넘겨 주니 정말로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이다. 남미를 갔다 온 뒤에도 다 같이 만나 수다를 떨 때 안데스의 눈물 드립을 치며 웃기도 한다.

여행이든 인생이든, 항상 좋은 일들만 생길 수는 없다. 잔잔한 흐름 속에서 어떤 날은 액땜한 셈 쳐야겠다 싶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물 흐르듯 잘 흘러가기도 한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 혹은 예상과 달라 아쉬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왜 내가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하고 자책하기보다는 ‘앞으로는 이런 점도 고려해야겠다, 하나 배웠네.’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안데스의 눈물처럼 좋은 경험으로 삶을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유진 변호사
● 법무법인(유) 바른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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