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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의 즐거움

노창원 승인 2021.04.01 14:38:40 호수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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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시절, 실패한 수강신청으로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미학의 이해’ 교양수업은 상당히 신선했었다. 그 당시 필자의 교육의 장은 교내보다는 교외 주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월요일 아침 9시 수업이요, 새내기가 교양수업에 전출한다는 것이 미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월요일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 정상에 있었던 인문관을 향해 전력 질주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수업 내용 역시 고등학교 이전 교육에 대한 통념을 깨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한 비판이었다. 내용인즉슨, 예술품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실제 예술품을 접하게 되었을 경우, 전문가의 감상이 아닌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위 수업의 결과로 나는 ‘누군가의 답사여행’이 아닌 ‘나만의 답사’를 해 보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결심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2017년 2월, 연수원 수료식을 마치고 인천으로 곧바로 내달려 공항에서 정장을 벗어 던진 후에야 비로소 실행될 수 있었다. 신한은행이 마련해 준 유로화와 88만 원을 주고 산 비행기 티켓을 손에 들고...

도쿄 하네다 공항에 밤 11시 30분에야 도착한 나는 신주쿠 망가킷사에서 샤워와 3시간의 숙면을 마치고, 술에 취해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던 일본 아저씨들을 바라보며 초밥을 먹은 후에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하룻밤 노숙을 한 후에야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여행은 지극히 즉흥적이었고 낭만적이었으며 강렬했다. 내리쬐는 태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대리석의 거대한 건물은 무던한 내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푸른 하늘 아래 무섭게 솟구쳤던 대서양의 파도는 지금 다시 떠올려도 모골을 송연케 할 정도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는 호카곶에서의 풍경도 매우 아름다웠지만,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주한 진한 붉은 노을에 깊게 적셔진 시골 풍경이었다. 리스본 시내에 무거운 밤이 내려오면 여기저기 흘러나오는 파두 소리를 따라서 독한 Porto와인을 홀짝이며 사람들과 같이 춤추며 흥얼댔었다.

뒤이어 날아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는 도착 순간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노을이 세기말적 분위기로 나를 압도하였고, 여섯 손가락의 운전기사님은 한없이 순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라케시에서의 거대한 시장에서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찾을 수 있었으며, 반짝이는 사막여우, 침 흘리는 낙타, 거나한 술판, 참을 수 없는 추위와 함께 사막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페즈의 버스 터미널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영국 유학파 출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손때 가득 묻은 볼펜을 선물 받았던 일도 추억이다.

정해진 일정이 없었기에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보아도, 모든 것이 즐거운 이벤트였고 신선했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었으며(모로코는 영어 사용을 하지 않아 웃음으로만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었다.

반면, 변호사가 된 지금은 마음껏 여행을 다니고 싶어도 돌돌괴사(咄咄怪事)라, 그때처럼 모든 것을 만끽하며 다닐 수가 없다. 또한 한바탕 업무 전화를 마치고 간신히 비행기에 올라타 해외 어딘가에 도착하면, 구글맵의 내 위치가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있더라도 마음 한편에는 두고 온 사건 생각, 의뢰인들 걱정에 여행에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필자의 지인인 모 변호사는(게임광이기도 하다) 변호사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본인은 고퀄리티 게임을 하며 원하는 세상 속으로 언제든 떠날 수 있기 때문에 휴정기를 쪼개어 가는 여행이 비효율적이라고도 이야기한다(물론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를 생각할 때, 메타버스를 통한 랜선 여행은 괜찮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체코 부다페스트 외곽의 지하벙커에서 서부 개척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시대별 총기를 펼쳐 놓고 실제 쏴 보았는데, 10여 년 전 대학교 후문 지하 PC방에서 동아리 사람들과 왁자지껄하며 총질한 것이 더 즐거운 추억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짬을 낸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철없기 때문만은 아닐지라... 나는 타인을 위하고, 타인을 대신하여 싸우고 항변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틀에 박힌 휴식, 효율을 따져가며 하는 여행이 아니라 투박하고 불편하더라도 생동감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삶의 순간들을 경험하고 추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휴정기에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제한되었지만, 금방 다가오고 있는 여름 휴정기에는 또 어떤 추억을 남길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노창원 변호사

노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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