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회보 인기 코너 ‘선배법조인의 조언’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커리어가 화려하신데, 전무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저는 현재 LG화학에서 근무하고 있는 민경화 변호사입니다. LG그룹에는 2013년에 입사하여 지주사 법무실을 거쳐 2015년부터 LG화학의 특허센터를 맡고 있습니다.
Q. 공대를 졸업하고 사무관으로 계시다가 법조인이 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1997년에 기술고시에 합격해서 이듬해부터 특허청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특허심사국에 잠깐 있다가 국제협력과라는 부서로 옮겨서 일을 했는데, 여러 면에서 법률 지식이 필요함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도를 이해하는 도구가 법이라고 느꼈고, 고민을 하다가 사법시험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9년 말 특허청을 그만두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3년을 넘으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기간 내에 결과가 나왔습니다(웃음).
Q. 2005년 판사로 법조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으셨습니다. 법원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아무래도 제가 특허나 기술과 관련한 법률 분야에 관심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다 많은 사건을 접할 수 있는 법원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직업적인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도 개인적인 성향과 맞아 법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Q. 처음 법관이 되셨을 때는 어떠셨나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했을 때 이상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왜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많은가’, 둘째는 ‘그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놀랍기도 했고 약간은 걱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판사들처럼 ‘내가 게을러서 당사자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고, 당사자들 입장에서의 부담감을 갖고 일했던 것 같습니다.
Q. 2006년에는 대법원에서 근무하셨는데, 당시 어떤 일을 하셨나요?
특허 등 지적재산권사건을 담당하는 재판연구관실에 있었습니다. 특허나 상표, 저작권, 영업비밀 침해 등과 관련한 상고심사건을 검토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하고 많은 사건을 접하면서 지적재산권 분야 사건의 특징과 법리를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Q.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파견가신 경위와 가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초반에 구 유고연방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내전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등 전쟁범죄는 거의 매일 CNN 등 외신에서 다룰 정도로 참혹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6 ·25 라는 전쟁을 겪었고 같은 아픔이 있었기에 전쟁범죄에 대해 국제사회가 어떻게 법적인 판단을 내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ICTY에서는 당시 권오곤 재판관님께서 주심으로 진행하시던 카라디치(Karadzic)사건팀에 소속되어 근무하였습니다. 카라디치는 유고연방 내 보스니아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공화국을 수립하여 대통령을 지낸 사람인데, 그 과정에서 무슬림들을 학살한 혐의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1심 공판과정에서 증인들의 증언을 요약하거나 여러 결정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습니다.
Q. 당시 기억에 남는 증언이 있을까요?
보스니아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트럭에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가서 산 위에 땅을 파고 학살을 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그 사람도 총을 맞았는데, 죽지 않고 기절을 했고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자신 같은 사람을 만났는데 두 사람이 한 일이 ‘같이 울면서 집에 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개인의 증언을 통해 기록으로 남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Q. 법관으로서 어떤 법관이셨나요?
8년 정도의 짧은 경력에 불과해서 뭐라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호기심 많은 법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매년 사무 분담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분야의 사건을 맡게 되는 것은 언제나 기대되는 일이었고, 이전에는 몰랐던 세상사를 알기 시작한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Q. 법원을 나오셔서 사기업(LG그룹)으로 적을 옮기게 되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법원에서 나올 생각이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법원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모변호사님의 소개를 통해 LG그룹으로의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LG트윈스 팬이었고, 제 처도 LG계열사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LG그룹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무척 감사\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아파트도 LG빌리지였습니다(웃음).
Q. 법원을 나오시면서 얻게 된 것, 잃게된 것을 한 가지씩 꼽자면?
딱히 어떤 것을 잃었다고 하기보다는 약간의 깨달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법원을 나오는 순간 무언가 놓치기 싫은 아쉬운 감정이 들었는데, 돌이켜보니 법관이라는 자리와 개인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 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판사로 근무하면서 국민이 판사라는 공직자에게 부여해 준 의무에 따른 권한을 행사했던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마치 자신이 개인적으로 따 낸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며 행동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었습니다.
얻은 것이 있다면 법원을 그만 두고 나서 LG에 근무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 바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고, 나중에 합격해서 명함에 미국변호사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써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LG그룹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2013년에 입사해서 처음에는 지주사인 주식회사 LG의 법무담당 산하에 있으면서 그룹 내 일반적인 법무 일을 하다가 2015년부터는 LG화학으로 자리를 옮겨 당시 신설된 특허센터를 맡게 되었습니다. LG에서의 경력 중 거의 대부분을 특허 등 지적재산권(IP)과 관련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Q. LG화학 특허센터는 어떤 곳이고, 지금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지난 10여 년간 LG화학이 빠르게 성장하고, 특히 전지사업이 본격화되면서 특허나 IP와 관련된 국내외 소송이나 분쟁이 확연히 증가하였습니다. 특허나 영업비밀 등 IP와 관련한 소송에서는 반드시 기술적 이해가 바탕이 된 변호사나 변리사 등 전문 인력들이 회사 내부에 필요합니다. 종래의 법무조직만으로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LG화학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특허 부서에 소송 권한을 부여하면서 특허의 출원부터 분석, 라이센싱 및 IP 소송에 이르는 완결적 기능과 이를 수행할 국내외 변호사와 변리사 등 전문 인력을 갖춘 조직으로서 특허센터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허센터장으로서 저의 임무는 특허를 통해 LG화학의 고유한 기술을 권리화하고 보호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IP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역할입니다. 그중에서 제가 꽤 신경을 쓰는 부분은 특허 등 IP 보호와 활용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소송이나 분쟁과 관련된 협상 부분입니다. 저의 직업적 전문성이 가장 많이 쓰일 수 있는 곳이자 궁극적으로 특허 자산 등의 존재가치를 대내외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Q. 특별한 협상 노하우가 있으신지요?
법원에 있을 때 조정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때 배운 경험을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아무리 한쪽이 잘못한 경우라도, 감정적인 후련함이나 명분 같은 것들이라도 얻어갈 수 있어야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유리한 쪽이라도 상황이 유리한 것과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양측이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잘 전달만 해 주어도 의외로 쉽게 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협상 과정에서 활용하여 좋은 결과를 여러 차례 얻을 수 있었습니다.
Q. 최근 경쟁사와의 배터리 영업비밀 및 특허 침해소송을 총괄하여 ITC에서 침해 결정을 이끌어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를 예상하셨나요?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기에 자세한 말씀은 드리기 어렵지만, ITC에서의 영업비밀 침해결정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ITC소송 초기에 많은 업무와 부담감으로 인해 힘들기는 했지만, 디스커버리가 진행되면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고 소송의 결과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Q. 결과를 전달받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회사 내에서 사업본부, 홍보, 대외협력, 법무 등 여러 조직으로부터 전사적인 지원을 받아 시작하고 수행한 소송이었기에 이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가장 앞섰습니다. 특히, 특허센터의 소송 담당자들이 밤낮으로 일하며 집에 가지도 못하고 힘들어 하고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던 기억이 나 참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었습니다.
Q. 소송을 미국에서 진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국에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실 증거의 확보 측면에서 미국에서의 디스커버리만큼 강력하고 효과적인 제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을 재판 관할로서 선호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진실 발견에 가장 최적화된 증거수집 제도를 운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거 차원에서 생래적인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열심히 효율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위험하고 부당해 보일 수 있습니다. 미국 법률시장의 성장과 미국 법원의 판단에 대한 높은 신뢰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스커버리를 한국에 도입하는 경우 작은 중소기업이나 개인도 큰 회사를 상대로 실질적인 권리구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모색적 증거방법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증거를 찾는 과정은 모색적일 필요가 있고, 그것이 증거를 수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외국기업으로서는 부담이 크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지만, 외국기업이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한국 법과 사법권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디스커버리를 도입하면 한국 법원의 위상이나 재판에 대한 신뢰도 당연히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판사들도 다른 나라 법원의 판결을 번역하여 전부 읽어 봅니다. 한국 법원이 증거까지 확보해서 판단까지 신속하게 내려 준다면 외국 법원도 한국 법원의 판단을 더욱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용이 증가될 것이라는 입장도 있을 수 있지만,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에 드는 비용에는 디스커버리 제도 자체가 아닌 번역업무로 인한 비용도 포함되어 있어, 비용 측면에서의 우려도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나아가 실제 제도의 운영과 관련해서도 변호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미국에서 진행되는 소송은 국내에서 진행되는 소송과 비교하여 증거방법이나 손해액의 인정에 있어 차이가 있나요?
우선 미국 소송 절차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이 하나 있다면 판사와 변호사 사이의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판사는 기본적으로 변호사의 말을 믿고 변호사는 직업적 윤리를 엄격히 준수하며 변론이나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변호사나 당사자가 진실되지 않은 주장을 하고 판사가 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변호사나 당사자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다시 회복하기 매우 어렵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판사의 재량권이 강한 미국 사법제도에서는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특징이 증거의 측면에서는 강제성으로 나타납니다. 당사자는 선의를 다해 증거수집 절차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를 위반하거나 판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받기 때문에 제도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사법제도 하에서는 손해배상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부당이득(unjust enrichment)을 손해의 하나로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손해배상에 관하여 권리자가 입은 손해의 범위에 한정하지 않고, 불법행위자가 얻은 이익까지도 손해액으로 넓게 인정하는 것이 불법행위의 방지나 계도적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어떤 리더이신가요?
같이 일하는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웃음). 처음 특허센터에 왔을 때 직원들에게 “우리 조직은 전문가들이 모인 조직이다. 전문가들의 힘이라는 것은 각 개인이 전문가로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그 의견을 놓고 토론하여 가장 올바르고 합리적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대화와 토론을 많이 해야 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특허를 등록하든 소송을 하게 되든, 결국 객관적인 제3자를 설득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의견을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 가장 신경쓰는 것이 직원들과의 토론입니다. 제 이야기로 인해서 직원들이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직원들 눈치를 많이 봅니다(웃음). 그래서 제가 만든 사자성어가 ‘화안난척(火顔難尺,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가늠하기 어렵다)’입니다.
Q. 법조인이 아닌 인간 민경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허당
Q.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있다면?
『코스모스(Cosmos)』라는 책입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코스모스를 읽고 수없이 밤하늘을 올려 보면서 환상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고 아직까지도 그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 저자인 ‘칼 세이건(Carl Sagan)’은 1990년 해왕성을 지나 태양계 밖으로 향하던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로 돌려 사진을 찍도록 합니다. 그 사진 속에 지구는 한 점에 불과했고 칼 세이건은 이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이름 짓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 역사, 제도, 사람, 문명이 우주의 저 티끌 같은 지구라는 점 위에서 명멸해 왔고 인류의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칼 세이건은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철학적인 말이나 글보다도 ‘pale blue dot’이라는 한마디 말과 사진을 통해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삶을 돌이켜보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Q. 앞으로 꼭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LG그룹은 첨단기술에 기반한 사업을 영위하는 회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최근 제가 LG그룹 내 특허협의회를 맡게 되었는데, 제가 LG에 있는 동안 만큼은 국내외 다른 회사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강력한 IP 조직이 각 계열사 마다 갖추어져 사업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Q. 가장 큰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은?
법조인으로서 제 판단이 맞는 것을 확인할 때 가장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스갯 소리로 점을 친다고도 말하는데, 결론을 정확하게 예상하거나, 의도한 대로 업무나 사건을 풀어갈 때 성취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Q. 시간 터널을 발견해서 대전지방법원 민경화 판사를 딱 5분 동안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실 것인가요?
일단 LG화학 주식을 좀 사 놓으라고 말하고 싶고요(웃음). 우선 책을 다양하게 많이 읽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많은 경험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겪어 본 후에 판사의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판사로서의 일을 시작하면서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분야의 책은 잘 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로 만나는 사람도 일과 관련이 있거나 비슷한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인식의 폭을 좁히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Q.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2021년의 후배변호사들에 대한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변호사라는 일이 한정된 소수만이 영위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변호사의 일은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분야로 나눠지고 있고,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후배변호사님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 로스쿨 등에서 배운 공부는 크게 보면 우리 사회가 움직이는 제도의 법적 틀을 이해하는 것이고, 작게는 수많은 사건에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공부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종합적인 판단능력을 키워 주는 훈련이기에 비단 법조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필요한 배움입니다. 전통적인 법조 영역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판단능력을 갖춘 인재를 필요로 하고 어찌 보면 변호사라는 직업이 갖는 최고의 장점은 여러 분야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넘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후배변호사님들께서 두려움을 버리고 조금만 더 용감해지면 어떨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인터뷰/정리 : 황귀빈 본보 편집간사
황귀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