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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 방탕한 목신은 기쁨의 섬에서 파멸한다

박선영 승인 2021.09.01 15:01:22 호수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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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와 로잘리 텍시에(좌) / 엠마와 드뷔시(우)


 드뷔시. 그 이름을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치는 멜로디는 ‘기쁨의 섬’의 도입부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사랑에 몸서리치는 남녀를 화려한 색감이 퍼져나가는 강렬한 음색으로 표현한 기쁨의 섬이 원한 서린 여인들의 피와 눈물 위에 떠있었음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드뷔시는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성격이었으나 그의 음악적 재능만은 뛰어나서 그 재능의 화려한 빛에 성격적 단점이 어둠 속에 묻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치와 허세도 매우 심해서 가난한 상황에서도 빚을 내서라도 고급음식을 향유하고, 최첨단 옷을 맞추는 등 철도 없었다.

 이런 철없는 드뷔시가 처음 진한 사랑을 시작했던 것은 돈을 벌기 위해 피아노 반주자로 일하다가 부유한 건축가의 아내이자 성악가였던 마리-블랑쉬-바니에를 만난 18세 때였다. 당시 드뷔시는 18세, 바니에 부인은 30대였으나, 둘의 사랑은 뜨거웠고 바니에 부인은 발칙하게도 남편 몰래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주며 드뷔시와 동거를 하기도 하였다. 사랑에 푹 빠진 드뷔시는 성악을 하는 바니에 부인을 위하여 가곡만 25곡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드뷔시가 ‘탕자(방탕한 이들)’로 로마대상에 입상하여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떨어져 있는 동안 바니에 부인의 마음은 차게 식었고 어린 드뷔시는 처절하게 실연을 당했다.

 실연을 당한 드뷔시는 로마 유학마저 포기하고 돌아와서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생활하였고, 25세 무렵 재단사의 딸이자 가정부 일을 하던 가브리엘 뒤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뒤퐁은 드뷔시와 약 10년 동안 동거를 하며 사실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고, 뒤퐁은 드뷔시를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그리고 드뷔시는 뒤퐁의 내조 속에서 자신의 대표곡으로 뽑히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작곡하고 이를 뒤퐁에게 헌정한다. 이렇게만 읽고 보면, 이들의 10년 동안의 연애는 너무나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32세의 드뷔시는 뒤퐁에게 헌정하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 초연되던 1894년, 뒤퐁과 동거 중이면서도 테레즈 로제와 교제를 시작하더니 심지어 로제와의 약혼을 발표한다. 당시 로제는 드뷔시가 뒤퐁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는데, 약혼 이후 동거사실이 발각되면서 로제는 약혼을 파기한다. 그리고 사랑에 눈이 멀었던 뒤퐁은 로제에게 실연당하고 돌아온 드뷔시를 받아주고 만다. 하지만 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드뷔시는 로제와 파혼하며 대대적으로 망신을 당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카트린 스티븐슨이라는 여성에게도 청혼하며 양다리를 걸쳤다.

 더 이상 드뷔시의 여성편력과 자신에 대한 무시를 견디기 어려웠던 뒤퐁은 1897년, 드뷔시가 35세가 되던 해에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친다. 그리고 뒤퐁의 자살시도를 기점으로 드뷔시와 뒤퐁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드뷔시의 뒤퐁에 대한 가혹하고 모욕적인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드뷔시는 마치 뒤퐁의 권총자살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뒤퐁의 친구인 패션모델 로잘리 텍시에(애칭 : 릴리)와 뒤퐁의 권총자살시도 직후 교제를 시작하였고, 2년밖에 지나지 않은 1899년에 결혼하였다. 아마 뒤퐁은 이 둘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뒤퐁의 저주는 우선 릴리를 직격했는데, 드뷔시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릴리를 두고 부유한 은행가의 부인이던 엠마 바르닥 부인과 바람이 난다. 두 유부녀와 유부남은 뜨겁게 타올랐고, 임신한 엠마와 드뷔시는 각자의 배우자를 피해서 영국령의 저지섬으로 도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드뷔시가 릴리를 팽개치고 엠마와의 불륜에 만취하여 작곡한 곡이 바로 ‘기쁨의 섬’이다.

 홀로 남은 릴리는 드뷔시와의 결혼 5주년을 5일 앞두고 자신의 친구 뒤퐁처럼 콩코드 광장 한복판에서 권총을 들고 자살을 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다가 총알이 배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진다. 릴리의 자살소동으로 드뷔시와 엠마의 평판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후원자는 물론 친구들까지 모두 떨어져 나갔으며, 결국 드뷔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원치 않는 연주여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엠마와 드뷔시는 상간녀 · 상간남 딱지를 떼 보고자 배우자와 이혼소송을 이어갔는데, 둘 사이에서 ‘클로드 엠마(애칭 : 슈슈)’가 태어나고도 3년이 지난, 190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식 부부가 된 지 1년 만인 1909년에 드뷔시는 직장암 진단을 받았고, 이후 드뷔시는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과 코카인을 복용하며 약에 취해 9년간 투병하다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드뷔시는 바니에 부인과의 불륜으로 인한 손해배상소송을 당했다면 그에 따른 위자료, 사실혼관계의 동거하는 여성이 있음을 감추고 로제와 약혼한 것이 파기에 이른 데 따른 위자료, 뒤퐁과의 사실혼 파탄에 대한 위자료, 릴리와 이혼한 데 따른 위자료까지 모두 합쳐본다면 족히 1억 원은 상회하는 값진 연애를 즐기시던 ‘탕자’라 할 수 있다.

 이런 드뷔시의 격정적인 연애사를 돌아본 뒤에, 드뷔시가 엠마에게 헌정한 ‘기쁨의 섬’을 들여다보면, 이 곡은 뒤퐁의 권총자살시도, 릴리의 권총자살시도는 물론 엠마의 배우자인 바르닥의 배신감과 분노, 주변 사람들의 실망과 멸시 속에서도 눈치 없이 오로지 둘만의 사랑과 쾌락을 노래한 드뷔시의 철없는 환호로 들려서 그 화려하고 다채로운 음계의 향연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며칠 뒤에 상간녀에 대한 손해배상사건이 있어서 재판정에 가야 하는지라 마음이 무거운데, ‘기쁨의 섬’이라도 들으면서 달콤하고 씁쓸한 사랑의 기억이 적나라하게 적힌 이 기록을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
 

박선영 변호사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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