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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변호사생활

황서형 승인 2021.11.03 10:37:21 호수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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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겨보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끝나서 매우 아쉽습니다. 다른 분야 전문직의 고민과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매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1, 8화에 나온 대사가 기억에 남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흉부외과 펠로우 도재학 선생은 맞벌이를 하며 한 달 용돈 10만 원만 받아 가며 모은 적금 1억 원으로 꿈에 그리던 전세를 얻는 줄 알지만 전세 사기를 당합니다. 정신이 나간 도재학 선생은 수술방에서 스승인 김준완 교수에게 혼나고, 그것도 모자라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 환자의 남편으로부터 고성과 반말이 뒤섞인 항의전화까지 받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의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 전화를 한 환자 딸에게 아버님이 전화 예절이 없다고 말하고 맙니다.

 환자 딸은 병원에 도재학 선생에 대한 확실한 불이익을 요구하는 민원을 넣고 병원장은 징계 수위를 고민합니다. 자책으로 병원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러 간 도재학 선생에게 병원장은 김준완 교수가 환자 딸에게 사과하고 사건을 잘 마무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병원장은 덧붙여 그 이유를 말합니다.

 “라뽀가 잘 형성되었던 모양이에요.”

 라뽀(Rapport)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관계를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교육에서는 의료진과 환자와의 관계에서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저의 법학전문대학원과 초년차 변호사 시절을 떠올려 보면, 별도의 수업보다는 실무수습, 리걸클리닉과 실제 사건을 처리하면서 라뽀라는 개념은 알지 못한 채 경험을 통해 조금씩 체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병원장의 대사를 듣고 돌이켜 보니, 소송 결과가 좋았던 경우도, 소송 결과가 의뢰인이 원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했지만 의뢰인과의 인연이 이어진 경우도, 사건을 처리하면서 의뢰인과 쌓은 신뢰관계의 도움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호사 초년차 때 경찰 수사 단계에서부터의 피고소인 변호를 담당했던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의뢰인인 피고소인은 외국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으로 고소인은 그 사업에 투자하신 투자자분이었습니다. 의뢰인은 투자가 이루어진 이후 한동안은 사업으로 얻은 수익을 투자자분께 배당할 수 있었지만, 한국과 해당 외국과의 외교 문제로 사업이 어려워진 이후부터는 배당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투자자분이 의뢰인을 투자금 편취로 고소한 것이었습니다.

 의뢰인과 투자자분이 만나게 된 경위, 투자 전 이루어진 대화 내용과 투자계약서를 살펴봐도, 고정된 수익을 약속하지 않은 지분투자였습니다. 투자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가 지는 것이 당연한데, 투자자분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싶어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당연히 쉽게 끝날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첫 피의자신문 때부터 빗나갔습니다. 기망행위에 대한 증거가 없음에도 담당 수사관은 제가 경험한 수사관들과 비교하여 필요이상의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변호인인 저에게도 모욕적인 언행을 하는 수사관의 태도에 수사관 교체 요청까지 고민했습니다. 그런 수사관을 상대로 상한 기분을 억누르며, 웃는 얼굴로 의뢰인 진술과 다르게 적힌 피의자신문조서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른 이유로 소속 법무법인을 퇴사하였고, 더 이상 그 의뢰인을 변호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이 결국 기소 의견으로 송치되었다는 소식을 끝으로 한동안 그 의뢰인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년 이상이 지난 후에 무죄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으로 그 의뢰인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 후로 꾸준히 명절 때마다 연락하며 코로나19 이후에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름다운 결말로 끝났지만 그 과정은 의뢰인에게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재판 때마다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고 사업을 내버려둔 채 귀국길에 오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의뢰인과 끝까지 그 과정을 함께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의뢰인과 제가 아름다운 결말로만 서로를 기억하고 연락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짧지만 길 수도 있는 경찰서에서의 시간 동안 쌓은 신뢰관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아는 것은 늘어나고 손은 빨라지지만 마음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던 시기에 진심을 다했던 시절을 기억하게 해 주는 드라마를 본 것 같아, 다른 분들과도 나누고 싶어 용기를 내어 글을 씁니다.

 

황서형 변호사

황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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