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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S 해운 박종규 고문 인터뷰

정희선 승인 2022.01.04 10:52:18 호수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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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SS 해운 박종규 고문은 비자금 없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① 리베이트 없는 영업, ② 투명한 회계 처리, ③ 성과공유제 등을 도입해 회사의 투명경영 체제를 확립하였다. 직원을 동업자로 보는 박종규 고문의 일관된 경영철학은 50년간 노사분쟁이 없는 회사를 만들었으며, 세 아들을 두고도 경영세습을 하지 않아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 사회의 어른인 박종규 고문의 경험과 경영철학을 들어 보았다.

Q. 1969년 KSS 해운 전신인 코리아 케미칼 캐리어스㈜를 설립하셨는데, 창업을 하신 계기가 있으실까요?

 1960년 10월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여 사주조합 결성 및 100주 사기 운동 등 국영기업을 살찌우고 깨끗하게 가꾸어서 국민에게 봉사하자던 신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어 1969년 2월 무작정 퇴사한 후, 다른 회사에 잠시 취직을 했다가 그만두고나니, 역시 해운회사에서 배운 게 결국 배밖에 없었어요. 해운공사에 있을 때 작성한 노트가 있었는데, 노트를 펼쳐 보니까 케미칼 화물 수송업이 내가 할 만한 작은 회사로서 꼭 알맞은 석유화학 제품 관련 물동량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석유화학 공장들이 일본에서 원료를 사다가 놔두는데, 일본 배가 운송을 독점하고 있어 그것을 우리나라 배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생각을 해
봤죠. 그게 계기가 아닐까 해요.

Q. 기업 경영을 하시면서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신 철학과 신념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인가요?

 리베이트 근절이에요. 해운공사를 다니면서 ‘만약에 내가 경영자가 된다면 구조적으로 이건 이렇게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주한테 리베이트를 돌려주는 것이죠. 국제적인 회사를 만들려면 장부가 깨끗하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려면 ‘리베이트라든지 뒷돈 주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회사를 차리고 난 뒤에 그걸 실천으로 옮겨야겠다 해서 실천으로 옮긴 겁니다. 이중장부도 없고 깨끗한 회사를 만들었죠.

Q. KSS 해운이 지속성장하던 25년 차에 대표이사직을 그만두시고 고문으로 내려오셨는데, 자녀분 중에 기업을 물려받으셨나요?

 아니요. 처음부터 회사를 동업 개념으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사주조합을 결성했죠. 그런데 동업 개념이라는 것이 ‘첫째는 정직하고 투명해야 하고’,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만두게 되면 동업자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동업자에게 물려줘야만 그게 맞는 겁니다. 동업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면 그렇게 안 했겠죠. 그래서 부사장까지 올라온 사람한테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나이 60이 되는 해에 결심을 했어요.

 아들이 3명 있는데, 아이들한테는 독립정신을 심어주는 생각으로 교육을 시켰어요. 한 번은 제 친구가 저희 집에 술을 먹으러 왔어요. 그 친구가 대학 다니던 아들을 보고 “너는 공부 열심히 해 가지고 아버지 회사 물려받아야 한다”라고 했죠. 흔히 있을 수 있는 대화였는데, 아들이 “그건 아버지 회사지, 저하고는 관계없습니다.”라고 딱 잘라서 얘기 하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제 친구가 무안했던 거예요. 그때 저는 속으로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아이들에게 회사에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고, 아들들도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는 생각 없이 각자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둘째 아들이 현재 사업을 하고 있는데, 저한테 사업을 기대서 한 게 아니고 독자적으로 자기가 사업을 개척해서, 지금은 작은 공장을 하나 하고 있어요. 첫째와 셋째는 미국에서 사는데, 과학자로서 이제 미국에 발을 붙였어요. 그래서 흐뭇합니다.

Q. KSS 해운 대표에서 물러나실 즈음에 제2의 인생이 펼쳐지고 있었다고, 바른경제동인회는 어떤 단체인지 궁금합니다.

 1993년도에 건립을 시작했어요. 1990년도에 상당히 노사 관계가 격화돼서 그런 상태로서는 사업을 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제가 주도가 돼서 한 30명의 사업가들, 학자들이 모여서, 우리가 직접 노사 관계를 풀어보고자 노사분과위원회와 회계분과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맑은 사회를 만들어야지, 이렇게 뒷돈을 많이 내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제대로 사업을 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탈세, 지하자금을 좀 줄여보자는 목표로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노사분과위원회는 서로 안 가려고 그랬어요(웃음).

Q. 바른경제동인회가 투명경영, 투명사회를 위해 기여한 사례가 있을까요?

 1993년, 바른경제동인회에서 정부에 ‘신용카드를 거래하면 얼마만큼 세금을 깎아준다’는 신용카드 인센티브 정책을 건의했어요. 그때 정부 세제실에서는 너무 시기상조라고, 지금은 너무 빠르다고 했죠. 그래서 제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6년 동안 세제실 실장이 바뀔 때마다 쫓아가서 이 제도를 도입해 달라고 계속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경기가 나빴어요. 경기가 나쁜 상태에서 현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고, 제가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오히려 많은 개인이 신용카드를 쓰면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1999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신용카드 인센티브 제도가 잘 정착해서 이제 3,000원 상품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Q. 2006년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오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당시 죽을 장소를 찾아서 내려온 거였어요. 2004년도에 제가 위암에 걸렸는데, 위를 전부 잘라내고, 식도와 소장을 연결했어요. 수술한 후에 항암치료를 해야 하는데, 당시 통계에 의하면 생존율이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숫자를 보고 ‘아, 이거 내가 10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당시 71세였는데, 오래 살았구나, 항암제 주사나 맞고 병원에 왔다 갔다 하면서, 아파트 같은 콘크리트 안에서 인공적인 도시 속에 파묻혀 살다가 죽기보다는 자연과 흙 속에서 한 번 살아 보고, 그것이 6개월이 됐든 1년이 됐든 관계 없이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먼저 ‘(항암치료)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이후, 제주도로 내려와서 한라산 수목원을 왔다 갔다 하니까 다리에 힘도 생기고, 3년 만에 오히려 건강해져서 10분의 1의 확률에 해당하는 사람이 돼 버렸습니다.

Q. 제주도에서의 삶은 어떠신가요?

 아주 만족하죠. 공기가 좋고, 자연이 좋습니다. 겨울에도 동백꽃이 있고 제주도에는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 없어요. 그런 계절 속에서 사니까 참 좋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날아오는 먼지가 완전히 없지는 않습니다만 여기는 조금 적어요.
 


Q. KSS 해운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익공유제’, ‘성과공유제’가 어떤 제도인가요?

 사실 1970년 초에 벌써 이익공유제를 하고 있었어요. 이익공유제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규정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속에 ‘이익이 많이 나면 동업자들(직원)에게 많이 주자’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당시 70년 초에 우리나라 재벌 회사들이 200% 이상의 보너스를 준 일이 없었는데, 저는 550%까지 줬어요. 동시에 ‘이걸 제도화시켜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익금이 나면 주주들도 이익을 가져가는데, 그 이익을 창출하는 직원들에게 안 줘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은 오히려 주주보다도 더 귀중한 사람이고, 돈이 없어서 주식을 사지 않을 뿐이지, 만약 정년 퇴직까지 회사에 있기로 한다면, 자기 인생 전부를 이 회사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웠습니다만 이런 생각에서 이익공유제라는 말을 붙여가지고 주주총회를 통과시켰죠. 영업이익이 나면 70%는 회사에 유보시키고, 나머지 30%를 가지고 주주들에게 18% 배당을, 직원들에게 12% 이익공유를 하는 것으로요.

Q. 대기업의 PS 제도와 다른 점이 있을까요?

 대기업의 경우 인사고과에 따라 사람마다 조금씩 성과급을 다르게 지급하는데, 저는 그것이 좋지 않다고 봐요. 마치 돈으로 사람을 유인해서 돈을 많이 받기 위해 일을 많이 하도록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이너스입니다. 사람이 늘 A만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직원의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없어요. 마음에 의해서 움직이도록 해 줘야 해요. 직책의 높낮이는 있지만 인격은 평등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KSS 해운의 이익공유제는 인사고과에 따른 차등 없이 동등하게 분배하고 있어요.

Q. ‘이익공유제’, ‘성과공유제’를 시행하고 어떠한 성과가 있었나요?

 접대비 예산이 남으면 직원들이 스스로 반납을 해요. 예전에는 연말에 부서 접대비 예산이 남으면 단합대회 같은 거 한다고 해서 모두 써버렸어요. 그런데 이제 접대비 남은 것을 그대로 회사에 넘겨 주면 회사의 이익이 되고, 직원들이 그 이익을 공유 받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어요.

 우리 선원들은 사고를 줄이는 데 열심히 해서, 이익공유제 시행 이후에 사고 발생 건수가 현저히 낮아졌어요. 사고가 발생하면 이익을 아무리 많이 내도 소용 없을 정도로 사고 처리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또 다른 성과는 각 부서마다 똑같이 이익공유를 하니까 부서 간 불필요한 경쟁이 없어지고 협력 체제를 이루고 있어요. 자기 부서 일이 빨리 끝났는데, 옆에서 절절매고 있으면, 옆 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인포메이션 공유가 돼요.

 마지막으로 프리 라이더(Free Rider)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프리 라이더는 주로 근무시간에 단타 주식을 해요. 그런데 이익공유제 도입 이후에는 상관이 겁나는 게 아니고 동료들이 겁이 나는 거예요. 다른 동료들은 늘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주식만 보고 있는 행위가 거의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아주 희한하게 ‘돈으로 사람을 꾀어서 일을 시키지 말라’라는 그 철학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어요. 대부분의 회사가 계층 간의 명령 제도 아닙니까, 우리나라 조직문화가 아직 수직적 상하관계인 부분이 있어서,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직원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인격의 평등성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Q. 『직원이 주인인 회사』라는 2번째 책을 쓰셨는데, 집필하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회사가 창립한 지 50년이 되니, 초창기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회사 초창기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선배들이 어떻게 어려움을 해결했는지, 그걸 앎으로써 현재 및 미래의 직원들에게 같은 유대를 가질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에서 책을 썼어요. 직원들에게 책 원고를 읽고 난 뒤에 제목을 무엇으로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압도적으로 ‘직원이 주인인 회사’라는 책 제목이 많이 나왔어요. 제가 일부러 책 제목을 그렇게 장려한 것도 아니고 회사의 직원들이 지어 준 것으로, 직원들이 ‘우리 회사는 벌써 자기네들이 스스로가 주인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죠(웃음).

Q. 고문님께서 생각하는 좋은 변호사란 어떤 변호사일까요?

 감성과 이성이 같이 작동하는 변호사가 가장 훌륭한 변호사라고 봅니다. 사람은 감성이 있고 이성이 있지 않습니까. 감성은 정열입니다. 어떤 일에든 정열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옳고 그르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나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쁜 의뢰인의 경우도 돈을 많이 내니까 대리를 하고 싶은 경우가 있죠. 그것을 억제하는 판단을 할 필요가 있죠. 감성이 옳고 그름을 제대로 밝히고 있죠. 그다음에 이성적으로 여러 가지 따져 보고 서면을 준비하는 것 등이 필요하죠.

Q. 평생 어떤 꿈을 꾸셨고, 요즘엔 어떤 꿈을 꾸시나요?

 저는 오직 ‘전문 경영인 체제’ 하나를 꿈꿔 왔어요. 전문경영인 체제로서 주식회사다운 회사를 만들자.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 왔어요. 혈연이 아닌 직원 중에서 뒤를 잇게 하여 현재 4대 사장이 책임경영을 해 가고 있어, 저는 이제 어느 정도 꿈을 달성했다고 봅니다. 이제 87세가 되는데, 충분히 이상을 실현해서 아주 행복합니다.

Q. 2022년 1월 새해입니다. 한국 사회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요?

 저는 낙관적인 편이에요. ‘한국 사회가 거꾸로 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모순도 있고 하나,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한 얘기를 해도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므로, 우리나라는 반드시 잘 될 수 있다고 봐요. 나쁘게 보지는 않습니다.

Q. 마지막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원들에게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법대로 살아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약자 편에 서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서서 돕는 변호사가 되길 바랍니다.
 

● 인터뷰/정리 : 정희선 본보 편집위원

정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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