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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몇 번이고, 기록부터

이승훈 승인 2022.08.01 09:17:07 호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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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 초년차 시절의 어느 금요일 퇴근시간 즈음, 파트너 변호사님의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객의 지인이 긴급체포를 당했는데 내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는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직접 들어보셔야겠다. 갑자기 죄송하지만, 저는 내일 일정이 있으니 변호사님께서 좀 수고해 주실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었습니다. “네, 물론 가능합니다!” 변호인선임신고서와 무인증명신청서를 준비하여 퇴근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지방의 어느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구치소 접견실은 겨우 익숙해지던 참이었지만, 경찰서 유치장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담당 수사관의 안내를 받아 잔뜩 긴장한 채로 비밀의 문과 좁은 통로, 어두운 계단을 지나 도착한 지하 유치장은, 구치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습니다. 초췌한 몰골의 의뢰인을 만나, 짐짓 익숙한 일인 척 인사하고 짧게 접견하였습니다.

 의뢰인은 구직사이트에서 대출 원금 회수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일하게 되었는데, 매일 아침 메신저 앱을 통해 “오늘은 어디로 가서 어떤 사람에게 얼마를 받아 어느 계좌로 송금하면 됩니다.”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다가, 단 며칠 만에 집 근처에서 체포되었다고 했습니다. 초년차 변호사의 일천한 경험과 지식을 돌아볼 것도 없이, 뉴스 보도로 흔히 접해 온 너무도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장소를 옮겨 피의자신문에 동석하여 문답을 들으며 상세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의뢰인은 정말 아무 문제 없는 아르바이트일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차량을 몰고 가서 대로변에서 피해자를 만나 현금을 전달받았고, 전혀 모자나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가까운 은행에 가서 현금을 송금했고, 근처 주유소에서 자신의 신용카드로 주유도 하였습니다. 이 ‘아르바이트’ 첫날 의뢰인에게 현금을 전달했던 피해자의 신고를 받은 수사기관이 신속하게 주변 CCTV 영상을 확보하여 의뢰인을 피의자로 특정하고 주소를 확인 후, 귀가하던 의뢰인을 어렵잖게 체포했던 것입니다.

 압수당한 의뢰인의 휴대전화에는, 의뢰인에게 수금을 지시한 성명불상자와의 대화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의뢰인은 순순히 “사실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의심하긴 했습니다.”라고 인정했고, 모든 수금 내역을 진술했습니다. 며칠 안 되는 기간에 수금 횟수가 십여 차례, 금액은 수억 원에 달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늦게 진행된 영장실질심사에서 나름의 변론을 펼쳐 보았지만, 여지없이 구속영장이 집행되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공소가 제기되었습니다. 열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 중 네 명이 신고를 접수하여 그 범죄사실에 대하여만 기소된 상태였습니다. 구치소로 이감된 의뢰인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상 관계로 주장할 만한 기구한 사정을 최대한 끌어모으긴 했지만, 피해자들과 합의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 불행 중 다행이랄지, 의뢰인의 부모님께서는 의뢰인을 도울 의지가 충만하였고 합의금도 어렵잖게 마련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문제는,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 조치 때문에 증거기록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피해자의 인적사항이라고는 이름 세 글자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첫 공판기일에 재판부에 피해자들에게 합의의사가 있는지 확인해 주실 것을 요청드렸고, 다행히도 몇 주에 걸쳐 차례로 피해자의 연락처를 전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악전고투 끝에 네 명의 피해자 모두와 합의를 마치고 처벌불원서를 증거로 제출한 후, 2회 기일에 최후변론을 마치고 선고기일을 지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의뢰인에게서, 별건으로 수사관들이 구치소에 찾아와 피의자신문을 받았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신원이 특정되지 않았던 다른 피해자들 중 한 명의 신고로 따로 수사가 진행된 건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수사단계에서 피해자와 연락이 닿아, 합의한 후 고소취하서를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고소취하에도 불구하고 해당 건에 대해서도 공소가 제기되었고, 종결되었던 위 사건에 대하여 변론재개 및 사건병합결정이 내려졌지만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 한 명, 한 명이 전국 각지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차례로 공소가 제기되어, 결국 병합된 사건들의 피해자가 총 아홉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중 여덟 명의 피해자와는 모두 합의를 마쳤지만, 마지막 한 명과는 연락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재판부에서 아무리 전화를 해도 피해자가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례차례 합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몇 차례 기일을 속행해 주셨던 재판부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며 종결을 예고한 상태. 이대로는 결국 일부 합의에 그치게 되어,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증거기록을 다시 살펴보던 중, 피해자 진술조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해당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의뢰인 외의 다른 전달책에게도 몇 차례 현금을 지급했는데, 그 장소가 하나같이 “○○시 ○○동 ○○학원 앞”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 앱에서 해당 학원을 검색해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무작정 전화를 걸어 “실례지만 혹시 ○○○님 계십니까?”하고 피해자를 찾았습니다. “네, 전데요. 누구시죠?”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렸습니다. 피해자는 그 학원에서 근무하던 중 보이스피싱을 당했고, 그 후로 휴대전화로 걸려오는 모르는 발신번호의 전화는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재판부에서 피해자의 휴대전화 번호로 몇 번을 전화해 본들 연락이 닿을 리가 만무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피해자와 합의를 마친 후 선고기일이 되었고, 내심 집행유예까지도 기대해 보았지만 결과는 몇 개월의 징역형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의뢰인은 각오했던 것보다 가벼운 형이라며 감사드린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기본 중의 기본인 기록 검토를 소홀히 한 탓에 곤란에 처했던 부끄러운 경험이었습니다만, 그나마 늦지 않게 기록으로 돌아가 단서를 찾았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면 성실하기라도 해야 할 터이니, 일단은, 몇 번이고, 기록부터 꼼꼼히 보자는 그때의 다짐을 새삼 되새겨 봅니다.

이승훈 변호사
●법무법인 규원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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