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조정철과 홍윤애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조정철(1751 ~ 1831)이 정조 시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제주 처녀 홍윤애와 사랑을 하여 딸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철을 다시 엮어 넣으려는 김시구 제주목사의 고문으로 홍윤애는 억울하게 죽고,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이 제주목사로 돌아와 버려진 홍윤애의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추모시도 지었다는 것이다. 유배자와 제주처녀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죽은 제주처녀, 그리고 오랜 세월 지나 제주목사가 되어 연인의 무덤 앞에서 추모시를 읊는 남자. 당연히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나의 흥미를 끌었는데, 마침 제주 현장검증이 있어 제주에 간 김에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현장검증을 마치고 애월읍 유수암리 342-9에 있는 홍윤애의 무덤을 향하여 차를 몬다. 가는 동안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가 계속 내 머릿속을 돌고 돈다.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홍계희의 집안에는 불안이 엄습한다. 더구나 정조가 홍인한, 정후겸 등을 귀양보내며 조금씩 정적들을 제거해나가자,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은 아예 정조를 암살할 생각까지 한다. 그리하여 자객을 궁궐에 침투시켜, 자객이 정조가 있던 경희궁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발각나 도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홍계희의 친척 홍계능과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이 작당해 정조를 몰아내고 은전군 이찬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음모도 발각된다. 모의자들은 당연히 목숨이 온전치 못하고, 은전군도 사약을 받는다. 왕조국가에서 왕자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역모자들에게 추대받기만 하여도 사약을 받는 것이다. 이때 조정철도 이러한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조태채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제주로 유배되는데 그친다.
조정철은 유배와서 김윤재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는데, 바로 이웃집에 홍윤애가 살고 있었다. 20살 꽃다운 처녀 홍윤애는 낮은 담장 너머로 27살의 젊은 조정철을 매일 보게되니 호기심이 일었을 것이고, 수심이 가득한 조정철의 모습에 동정심도 일어 밥도 해주고 옷도 해주었다. 그런데 젊은 남녀의 계속되는 만남이 어찌 그냥 얼굴만 바라보다 마는 사이로 그칠 것인가? 어느 순간 홍윤애는 조정철 앞에서 옷고름을 풀고 한 몸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딸까지 태어났다. 참! 27살이면 당시로서는 조정철도 이미 유부남이었을 것 아닌가? 육지에 외로운 본처를 놔두고 섬에서 처녀와 사랑놀음을 하였다면,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빛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철의 아내는 조정철이 역모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을 때에 목을 메어 자결하였단다.
이들의 꿈같은 사랑은 딸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끝이 났다. 조정철의 집안과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인 김시구가 정조5년(1781)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다. 김시구는 조정철이 순탄하게 유배생활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어떤 죄목으로든 조정철을 엮으려고 한다. 죄를 인정치 않는 조정철에게는 당연히 곤장 세례가 떨어졌고, 조정철이 초주검이 되어도 끝내 죄를 인정치 않자, 이번에는 홍윤애를 끌고 왔다. 그리고 평소에 조정철이 임금을 원망하던 말을 하지 않았냐며 홍윤애를 몰아치고, 홍윤애가 부인하자 홍윤애에게도 매타작이 떨어진다. 홍윤애는 사랑하는 님을 지키겠다며 굳은 결심으로 매타작을 견뎌냈지만, 계속되는 매타작에 결국 살점이 뜯겨나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몇 번씩이나 까무라친다. 그러다가 결국 홍윤애는 육지에서 온 남자를 사랑한 죄로 꽃 같은 목숨을 잃는다(님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한다). 그럼 홍윤애가 낳은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윤애는 이런 것을 예감하였는지, 언니에게 부탁하여 아직 백일도 지나지 않은 딸은 어느 절에 맡겨졌단다.
이렇게 홍윤애가 죽어나가니 김시구로서도 사건을 덮을 수 없어 거짓말로 꾸민 장계를 한양으로 올린다. 그렇지만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어사 박천형의 조사로 무고함이 밝혀져 김시구는 파직되고, 조정철은 정의현(지금의 성읍 민속촌 지역)으로 이배된다. 그후 조정철은 추자도, 광양, 구례, 황해도 토산 등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805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온다. 그러니까 1777년 귀양살이를 시작하여 29년의 긴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온 것이다. 그리고 복권되어 다시 벼슬살이를 하는데, 1811년에 제주목사가 되어 제주로 왔다. 죄인에서 제주도 최고행정책임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마 제주목사를 자원하지 않았을까? 돌아온 조정철은 당연히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그녀를 추모하는 시도 쓴 것이다.
홍윤애의 무덤 앞에 섰다. 무덤은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작은 길 바로 옆에 있고, 앞은 작은 계곡으로 되어 건너편 숲까지 탁 트여있다. 무덤 앞에는 2016. 11. 1. 애월읍장이 세운 의녀 홍윤애지묘(義女 洪允愛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묘비 뒤에는 한글로 번역된 조정철의 추모시가 새겨져있다.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 지 몇 해인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을까
진한 피 고이 간직하니 죽더라도 인연으로 남으리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고
일문에 높은 절기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한 떨기 꽃 글론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홍윤애가 죽은 지 29년이 지나 환갑이 되어 애통하게 죽은 연인의 무덤 앞에 선 조정철. 추모시에서 조정철의 애끓는 심정이 배어나온다. 그런데 홍윤애의 무덤에 바로 붙어 다른 무덤이 있다. 홍윤애의 외손자인 박규팔(1803 ~ 1822)의 무덤이란다. 그러니까 홍윤애의 딸이 나중에 커서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할머니와 손자의 무덤이 바짝 붙어 나란히 있을까? 원래 홍윤애의 무덤은 제주시 삼도일동에 있었는데, 그곳에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이곳 손자 옆으로 이장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는 자그마한 표석이 놓여있고, 그 일대의 길 이름을 홍랑길이라고 하여 홍윤애를 기념하고 있다.
잠시 홍랑의 무덤 앞에서 묵념을 한다. “홍랑이시여! 그 살이 터져나가고 뼈가 부서지는 그 무서운 고문을 어찌 견뎌냈는지요. 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그 참혹한 고통을 생각하자니 제 몸도 떨려오는군요. 200년 후의 후인이 당신 앞에 잠시 섰다 갑니다. 편히 쉬소서!” 차를 돌려나오는데, 바라다보이는 서쪽 하늘가에서 홍윤애와 조정철이 딸과 함께 빙긋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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