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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기다림

김희란 승인 2019.07.01 15:02:49 호수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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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이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밤 12시에 문을 열고 아침 7시까지 영업을 한다. 늦은 시각 퇴근하는 직장인부터 새벽시간대 출근하는 손님까지 직업, 연령층도 다양하고, 각자 삶의 방식도 다르다. 식당은 일정한 메뉴가 없고 그날그날 재료가 있는 한 가급적이면 손님들이 주문하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식당 주인(마스터)은 손님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고민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정성스레 만든 마스터의 음식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한다.

나 역시 의뢰인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사건이든 정성껏 서면을 작성하고 변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기다림은 심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단 20초 내지 1분이라도 나를 알리기 위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인터넷에 법률 기사를 싣고 블로그 활동을 한다. 그렇게 기다렸던 의뢰인이 사건을 가지고 나를 찾아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 감동이란...

불륜, 마약, 협박, 성범죄, 이혼 등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 본 나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의뢰인들을 보면서 변호사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의뢰인의 세상을 간접 경험하면서 그들의 고민을 공유하며 법률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무거운 이야기부터 공기보다 가벼운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되었다가 빗물을 맞고 눅눅해지기도, 바람에 흩날려 버리기도 했다.

올해 따뜻한 봄날, 한 의뢰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 인사차 찾아뵙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작년 2심 형사재판이 선고된 뒤 오랜만에 본 그녀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늘색 원피스 차림으로 사무실을 들어서면서 그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고, 나 또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 전우애가 이런 감정일까?

그녀는 3년 전, 내가 변호사 개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를 찾아왔었다. 전 남자친구로부터 오랜 기간 데이트폭력에 시달려왔고, 헤어진 이후에도 교제를 요구하며 지속적인 협박을 받고 있었다. 데이트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연락을 피하거나 전화번호, 주소를 변경하는 등 초기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폭력이나 협박 등 피해사실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가해자가 보내온 메일, 문자메시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지우기도 한다. 사생활이 주변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우려했고, 가족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의 의뢰인도 그러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지속적으로 그녀가 이사간 집을 알아내 찾아오는가 하면, 바뀐 그녀의 전화번호로 나체사진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였다. 급기야 주변사람들에게도 나체사진을 유포하였다.

피해 사실을 확인한 후 고소장을 면밀히 작성하여 관할 검찰청으로 형사고소를 하였다. 범죄사실 수만도 상당하였다. 의뢰인과 함께 세 차례 경찰조사를 받았고, 정보공개청구 등 추가 증거를 확보하는 대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2차 피해를 막기 위하여 접근금지가처분을 신청하였고, 다행히 법원에서 인용이 되었다. 1년 넘게 수사는 계속되었다. 담당수사관은 가해자로부터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압수하였고, 디지털포렌식을 통해 당사자들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분석하였다. 그러나 대화내용들을 모두 복구하지 못하였고, 고소사건 중 일부는 증거불충분 혐의 없음 처분될 수밖에 없었다.

일부 혐의는 인정되어 폭행, 협박죄 등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형사재판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피고인은 일부 공소사실에 대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였다. 증인으로 출석한 의뢰인 앞에서 그녀의 내밀한 사생활을 언급하는가 하면, 교제 당시 두 사람이 나눈 문자메시지를 제시하면서 그녀는 처음부터 문란한 여성이었다고 모욕하였다.

피고인은 그에 그치지 않고 의뢰인을 무고죄로 고소하였다. 피해자에서 피의자 신분이 된 그녀는 가림막을 설치한 채 경찰서에서 상대방과 대질조사까지 해야 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변호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변론할 수밖에 없었다. 무고죄는 다행히 증거불충분 혐의없음으로 처분되었으나 피고인은 항고를 거쳐 재정신청까지 하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소송의 터널 속에서 의뢰인을 지지하며 힘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1심 형사재판에서 의뢰인의 억울함이 묻히지 않도록 수차례 변호인의견서와 참고서면을 제출했다. 다행히 전 남자친구인 피고인은 모든 공소사실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피고인은 항소했지만 항소 역시 기각되었다. 판결선고를 듣고 법정을 나왔을 때 잔잔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는데 그동안의 모든 수고를 잊게 만들었다.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웠고, 햇볕은 따스했다.

따뜻한 봄날, 의뢰인을 마주하면서 그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1시간 30분이 걸리는 경찰서까지 찾아갔던 일, 담당수사관과 긴 시간 나눴던 전화통화, 공판 검사를 찾아가 재판 진행 과정을 논의하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호소했던 일, 증인신문절차에서 피해자가 흘린 눈물, 판결선고 후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던 그녀의 목소리... 그 모든 과정들이 우리를 든든한 동지로 만들었다.

그녀는 꿈이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피해를 겪지 않기 위해 나처럼 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한마디가 업무에 지쳐있던 일상을 녹여주었다. 사람을 기다리는 일, 나를 찾아준 그들의 고민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헤쳐 나간 시간들이 모두 의미 있게 느껴졌다.

김희란 변호사
●법무법인 리더스

 

김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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