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옳음’이란 무엇일까 - 이기고 싶지 않았던 기묘한 소송

김성훈 승인 2021.08.02 13:48:49 호수 605

공유
default_news_ad2


 의뢰인은 법률 분쟁에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오고, 변호사는 의뢰인을 대리해 법정에서 법률을 무기로 상대와 다툰다. 원고의 주장과 피고의 주장이 맞서고, 재판부는 그 주장들 사이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판단을 내린다. 원고와 피고의 이해는 갈리고, 원고 대리인과 피고 대리인의 주장은 충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속변호사로 활동하며 이러한 구조에 익숙해지던 즈음, 파트너 변호사님이 필자에게 “승패는 큰 상관없는 사건이나, 늘어지면 회사가 위험해지니 속히 결론만 내오면 된다”며 어떤 작은 회사의 사건을 맡겼다. 처음에는 ‘승패가 상관없는 사건이 있나’ 싶었는데,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니 바로 이해가 갔다.

 필자가 대리한 회사는 어떤 작은 제조업체와 제품공급약정을 맺어 약간의 선금을 치른 뒤 제품을 공급받고, 입고된 제품에 대한 하자 검수를 마친 후 잔금을 지급하는 계속적 거래를 해 왔다. 그러나 상대 업체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끝에 임금까지 체불하였고, 우리 회사가 잔금을 지급하기 얼마 전 그만 도산하고 말았다. 도산 직전, 상대 업체의 대표는 함께하던 직원들이 밀린 월급과 퇴직금이라도 챙길 수 있도록 노동자들에게 우리 회사에 대한 대금채권을 양도했고, 이에 상대 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우리 회사를 상대로 양수금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의뢰인도 우리 회사가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다만, 누구에게 지급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우리 회사 역시 작은 업체였는데, 그 작은 회사의 계좌에 수십 개의 압류 및 전부명령, 가압류명령이 붙었다. 상대 업체가 채무초과 상태로 도산함에 따라 상대 업체의 채권자들, 역시 영세한 규모의 작은 업체들이 그나마 회수 가능성이 있는 우리 회사에 대한 채권에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기고 싶지 않았던 재판

 서둘러 공탁을 하여 자금회전이 막히는 위기는 넘겼고, 우리 회사는 이 사건의 승패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제 필자가 고민할 시간이었다. 우리가 이기면 공탁금을 채권자들(영세 업체들)이 가져가고, 우리가 지면 공탁금을 노동자들이 가져간다. 피고의 대리인이니 당연히 사건을 기각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러면 상대방 노동자들은 소액체당금 몇백만 원 외에는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사건을 진다면 우리 회사의 책임과 관련하여 불필요한 시빗거리를 만들게 됨은 물론, 영세한 채권자 업체들이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이 많았고 파트너 변호사님과 이야기를 나눠봤으나, 역시 ‘상대 사정이야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우리 회사에 부담을 남길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변론을 준비했고, 양수금사건 관련 ‘특정 법리’에 따라 우리가 승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섰다. ‘원고는 원고의 자리에서, 피고는 피고의 자리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면, 재판부가 시시비비를 가려 합당한 판결을 내려줄 것이다’라는 당연한 원칙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변론에 나갔는데, 그 원칙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재판부 역시 사정을 알고 있었고, 고민하고 있었다. 재판장님은 고심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피고 측은 ‘특정 법리’에 관한 주장을 철회해 줄 수 없나. 상대방이 받아야 할 돈이 밀린 월급과 퇴직금인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기일은 계속 되었고 ‘안타깝지만 주장 철회는 불가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죽상이었는지 변론을 마치고 나가며 상대 변호사님이 ‘재판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때가 있지요’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나도, 원고 대리인도, 재판부도 모두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알고 있었다. 재판정은 신기하게도 ‘시시비비’를 가르는 곳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원고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원고 측에서 화해권고 결정이라는 묘안을 내놓았다. 일단 다음 기일까지 화해권고 결정으로써 원고들이 공탁금을 회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건 채권양수도가 유효하다’는 판단이 기재되지 아니한 화해권고결정문은 ‘원고가 피공탁자임을 증명하는 서류’로 보기 힘들며, 원고 외 피공탁자들이 존재하므로 기판력의 범위 등이 문제 되어 이로써는 공탁금 출급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결국 화해권고 결정을 통한 종결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판결만이 남았다. ‘이길 것이다’라는 계산이 선 사건의 선고기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것이 불안했다.

 그리고 판결이 나왔는데, 뜻밖이었다. 지면에서 밝히긴 어려우나 정교하고 우아한 논리로 원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재판부의 경륜과 기지, 법리 전개가 돋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를 했고, 파트너 변호사님은 “잘 졌다”고 했다. 항소하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이 글을 쓰며 당시의 판결문을 다시 읽어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판결문이다. 사실 정말 법리적으로 ‘옳은’ 판결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의 재판이 정말 ‘옳은’ 재판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원고 측 노동자들은 밀린 월급과 퇴직금의 일부를 변제받았으나, 우리 회사의 계좌에 가압류와 압류를 했던 회사들은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된 결론이 옳은 것이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그날의 재판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다루고 살피다 보니 어느새 개업을 하고 5년 차에 접어들었으나, 아직 사건에 있어서, 또 의뢰인에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제 30대 중반에 다다랐으나 살아가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누군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히 알까. 그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판단한다면, 그 고민의 과정 자체만은 옳을 것이라 믿을 뿐이다. 알 수 없다고 그 고민을 회피하거나 관성에 의존하는 순간, 그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김동인이었나, “무지개 잡기를 멈추던 순간, 아이는 폭삭 늙어 버렸다”고 했다.

 ‘옳음’, ‘정의’라는 말은 무지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며 쫓기를 멈추는 순간, 또는 자신은 이미 그걸 잡았다며 멈춰 서는 순간, 그 사람은 폭삭 늙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아직 고민 중이고, 가능한 고민은 멈추지 않으려 한다. 그날의 재판과 판결의 법리가 옳은 것이었는지도 아직 고민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날 법정에서 고민하던 나, 상대 대리인, 그리고 재판부는 옳았다.
 

김성훈 변호사
● 법무법인 명재

김성훈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글

set_C1
default_side_ad2

포토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글 및 최근글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