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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이영호 승인 2022.05.02 14:20:25 호수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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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김혜진


 주인공 ‘그’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 이웃과 같은 사람이다. 20년 이상 한 회사(통신 회사)에서 한결같이 일해 왔고, 승진하려 경쟁한 적도 없다. 그저 익혀 온 일을 계속 하다 여기서 정년퇴직하고 싶을 뿐이다. 지나온 젊은 시간을 함께한 ‘회사’를 한두 차례 경고로 그만둬 버리면 지나온 시간들이 퇴색되는 것 같아 싫다. 부인도 따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아들 녀석은 평범한 고등학생인데 고맙게도 대학에도 합격했다. 먼저 퇴직한 동료가 부동산 투자에 성공했다기에 무리한 대출과 전세를 끼고 다세대 주택을 사서 노후에 월세를 받으며 살기를 꿈꾼다.

 ‘그’는 주위 사람들 어려운 것을 지나치면 마음이 불편하다. 형편이 어려워도 어머니 집을 고쳐드리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형제도 돕는다. 고객의 민원을 처리해 주고 회사동료의 일을 도와주다가 자기 맡은 업무만 충실히 하라는 상사의 경고를 받는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했던가? 이 정도의 ‘그’라면 무슨 큰 복을 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평범하게는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회사는 ‘그’의 나이와 실적 부진을 이유로 자꾸 징계를 주더니 결국 사직을 권한다. 거부했더니 출퇴근도 불가능한 시골 출장소로 발령을 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회사를 다니고 싶다.
 

 그러던 그가 점점 달라진다.
 언젠가부터 그는 ‘그’가 아닌 ‘9번’이 된다(‘9번’은 근무지에서 새로 그에게 부여된 사번이다). 형 대신 조카를 도와달라는 어머니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통신 철탑 설치 현장에 발령난 ‘그’는 민원을 제기하는 현지 주민들과 격투기 하듯 싸운다.

 ‘그’는 그저 ‘회사’가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건 ‘잘못’되거나 ‘나쁜’ 일이 아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이 책의 추천사는 이 소설은 삶의 처절함, 노동 소외, 산업화 사회의 그늘을 풀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만 이 소설을 해석하자니 허전한 것은 왜일까?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나’와 ‘나 이외의 것’ 또는 ‘나’와 ‘세계’.
 이 소설에서 ‘그’는 ‘나’를, ‘회사’는 ‘나 이외의 것(세계)’을 대별한다. ‘세계(회사)’는 ‘나’의 바깥에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저 스스로 존재하고 기능한다. 어떤 선악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떤 당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실존할 뿐이다.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었다. 농노의 지위가 고대 노예의 상황과 가까운 경우가 있을지언정 어찌 되었건 영주는 농노를 책임졌다.

 그런데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지적하듯 산업화, 화폐화가 진전되면서 농노가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자본가는 도시 노동자가 된 농노에게 ‘임금’을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회사’는 ‘그’ 이외의 ‘세계’에 그냥 존재하며 스스로 기능할 뿐이다. ‘회사’는 ‘그’에게 고용계약에 따라 업무를 지시하고 ‘임금’만 성실히 지급하면 될 뿐, 그 이외에 ‘그’의 상황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런 회사를 비난할 수는 없다.

 반면, ‘그’에게 ‘회사’는 지나온 삶의 증거이자 정체성의 흔적이므로, 애정의 대상이다. ‘회사’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해도 ‘그’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그 ‘부조리’함을 밝힌다.
 ‘그’와 ‘회사’의 관계가 부조리함, 그것이 본질이었던 것이다. ‘회사’라는 ‘신화’(유발 하라리 언급)는 이제 ‘실존’하여 나와 부조리한 관계를 맺는다. 그 부조리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그’는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그’는 마지막 장에서 첨탑에 기어 올라간다. 이 장면에서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저)의 주인공 안나와 『19호실로 가다』(도리스 레싱 저)의 주인공 수전이 그러했듯, 혹시 ‘그’가 스스로를 세상에 내던지려는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그랬다면 이 소설은 추천사에서 말하듯 삶의 처절함과 노동 소외를 외친 소설이라고 볼 수밖에.

 나와 세계의 실존과 그 부조리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상에서 ‘나’와 ‘세계’ 사이의 본질인 부조리를 깨닫지 못하면 남은 것은 자기분열과 자기침식뿐.

 『이방인』(알베르 카뮈 저)의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빛이 눈부셔’ 총을 쐈고, ‘그’는 스스로 쌓아올린 송전탑에 기어올라 다시 그 첨탑을 분해해 떨어뜨린다.

 그렇게 ‘그’는 시지프가 되어 ‘9번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호 변호사

이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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