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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도덕적 기초

박재혁 승인 2022.06.02 17:32:17 호수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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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uqinas)

 중세 신학자 레오나르두스 레시우스[Leonard Lessius(1554 - 1623)]는 ‘정의와 법에 관하여(De iustitia etiure)’라는 논설에서 사법권 남용에 대한 방어 대책으로 “법에 따라 재판하고 법적 절차를 준수할 것(Judge according to the laws and observe the order of legal process)”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레시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합법성원칙(secundum leges iudicandum)이고, 다른 하나는 적법절차원칙(servetur ordo iuris)이다.

 당시는 스콜라 철학(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던 신학에 바탕을 둔 철학적 사상)의 오랜 전통이 확고히 유지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다른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를 판단하는 재판작용을 맡는 사람이 갖는 본능적인 두려움은, 만일 그가 오판으로 무죄한 사람을 죽게 한 경우, 그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당시 크리스천 재판관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피를 흘리는 것을 매우 꺼렸다고 한다(Wim Decock, “The Judge’s Conscience and the Protection of the Criminal Defendant: Moral Safeguards against Judicial Arbitrariness”, 2013).

 레시우스는 ‘정의와 법에 관하여’ 2권 네 번째 섹션을 할애하여 법원과 법관의 불의(챕터 29), 고소인과 증인(챕터 30), 피고인과 변호인(챕터 31)에 관하여 논했다. 특히 레시우스는 재판장이 법적 절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사적 지식에 근거하여 피고인을 유죄로 처단하는 것에 대해 고찰하고(dubitatio 11), 서로 다른 형사절차의 내용을 소개하였으며(dubitatio 12), 마지막으로 법관이 적법절차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피고인을 처단한 경우 법관은 피고인의 상속인들에게 어떠한 보상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였다(dubitatio 18).

 재판에 있어서 양심(conscience)은 과연 법관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적법하게 확립된 증거에 근거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는 그의 ‘conscience’에 의존하여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2세기 철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Aulus Gellius)의 저술 ‘Noctes Atticae’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한 중세의 모범적인 답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법언이 말해 주는 바와 같다. 즉 법관은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에 따라 판단하여야 하고, 그의 ‘conscience’에 의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iudex secundum allegata non secundum conscientiam iudicare debet).

 먼저 ‘conscience’를 의미하는 라틴어 con-scientia는 중의적인 단어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위 단어는 도덕적인 함의(moral connotation)를 가질 수도 있지만, 단지 어떠한 사실을 안다는 것(simple knowledge)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보통법 시대의 학자들도 ‘conscience’의 중의적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응용하여 다음과 같은 재치 있는 말을 만들기도 하였다. “법관은 ‘conscience’에 따르면 안 된다. 왜냐하면 ‘conscience’에 따라 재판할 경우 ‘conscience’에 어긋나는 많은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Conscience’ should not be followed by the judge since a lot of things happen with ‘conscience’ against ‘conscienc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uqinas)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위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법관은 그의 직업이 갖는 공공적 성격 때문에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가 있다. 법관은 공적 기능(public function)을 수행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며, 단지 그의 개인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적으로 수집한 정보에 의존하여 판단하여서는 안 되고, 공적인 신분으로 알게 된 것에 의존해야 한다. 이러한 공적인 정보는 증인의 증언, 기타 공적인 서류들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재판은 신적인 진실(divine truth)을 찾는 것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법관은 자기 자신의 권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권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관의 진실발견의무의 기준은 공공의 진실일 뿐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다.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견해를 거짓 참소의 희생양이 된 결백한 피고(innocent defendant)의 경우에도 유지하고 있다. 이 경우, 판사는 그가 공적인 증거에 판단의 근거를 두고 있는 한, 비록 그것이 그의 개인적 ‘conscience’에 반하는 경우에도 그의 양심은 안전하다고 하였다. 무죄한 자를 처단한 책임은 거짓 증언을 한 증인에게 돌아가고 그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퀴나스의 견해는 legalist opinion이라 명명되었고, 도밍고 드 소토[Domingo de Soto(1494 - 1560)]는 위 legalist opinion을 이어받아 법관이 사적인 정보에 의존하여 판단하게 될 경우 공공질서가 부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고 아는 체하는 법관에 의해 정의는 언제나 부정될 수밖에 없다(Justice could always be declined by a judge who pretends to know that the truth is opposite to the evidence). 둘째, 국민들은 드러나지 않은 것(법관의 사적 지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만일 법관이 공적인 증거물에 따르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거세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Since the people do not judge what is hidden – that is the judge’s private knowledge – they would inevitably cry out against the judge if they saw that the judge did not stand by the public proofs).

 소토의 견해는 결국 공공질서의 안정을 강조한 것으로, 사법제도의 본래적 기능을 국민의 정의실현에 대한 믿음에서 구한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의를 선포하는 법관은 재판을 통해 국민을 설득할 것이 요구되고, 이에 따라 국민들은 재판이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법관이 제출된 증거에 따라 재판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iudex secundum allegata non secundum conscientiam iudicare debet’ 라고 하는 법언이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법제도의 궁극적인 요청을 지키기 위해 법관은 그의 ‘conscience(사적인 윤리적 판단뿐 아니라 사적 지식을 통칭하는 의미에서)’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의 재판으로 돌아와 생각해 볼 때, 재판에서 주장된 정반대로 모순되는 증거와 증언에 대하여 이성과 논리에 의한 판단을 하지 않고, 막연히 어느 일방 당사자의 주장이 믿기 어렵다고 배척하고 결론을 내버리는 재판은 법관이 공적인 증거자료에 의존하여 재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적 지식 내지 편견(by a bigoted judge who pretends that he knows better)에 따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재판을 통한 권리구제라는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는, 너무나 똑똑하여 어느 누구의 설득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법관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합리적인 사고력을 갖춘 법관이 재판에 드러난 증거자료를 충실하게 이해하고 이성과 논리에 맞는 판단을 할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법이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가 단지 국가의 강제력 또는 독점적 지위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법은 우리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사법에 대한 불신은 결국 우리 사회가 뿌리박고 있는 도덕적 기초를 훼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박재혁 변호사

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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