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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능력주의와 법조인

양동운 승인 2022.07.06 11:38:56 호수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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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 화두는 ‘공정’이다. 2010년은 정치철학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이었다. 미국보다 열 곱절 이상인 130만 권이 한국에서 팔렸다. ‘정의’에 목마른 한국은 샌델이 던진 주제와 소통방식에 매료되었다. 10년 뒤 그 인접개념인 ‘공정’이 화두이고, ‘기회냐? 결과냐?’의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기호 돌려막기’로는 목마름이 해소될 수 없다.

 사물을 표상하던 기호들의 체계는 어느덧 사람의 뇌를 구조화하고 그 고유 질서로 세계를 감각하도록 한다. 법조인 역시 고유의 법률체계와 개념으로 세계를 재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공정’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와 반대로 행할 필요가 있다. 충분히 소급하고, 심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 정치 · 경제 · 문화 현실의 빅데이터가 필요하고 사회 · 인문학은 물론 지구 생태계의 순환과 자원(에너지) 이동에 관한 이해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해명작업은 한 개인의 ‘능력’을 크게 떠나 있다. 그럼에도 ‘일즉다(一卽多)다즉일’의 눈에 의지해 법조인(一)을 소재로 우리 사회 공정의 현실(多)을 엿보고자 한다.

 추상적 보편주의나 실증주의 시각으로 ‘공정’의 기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공정’은 특정 절차와 그에 따라 공인받는 일회성 ‘능력’에 종속되는 ‘공정’이자 ‘서열’로 자리매김한다. ‘가족주의’는 그 사회 · 심리 기반이자 실천 동력이다.


‘능력주의’의 정점에 선 법조인
 ‘능력주의’는 ‘오래된 미래’다. 성골에 대한 육두품,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한 신진사대부, 조선말 세도 가문에 대한 중서(中庶)층의 오랜 꿈. 마침내 한반도 이남 ‘능력주의’가 활개칠 근대 시공간이 열렸다. 능력의 화신 중 하나는 법조인이었고, 그 주변에 오랜 꿈과 신화가 어른거렸다. 개인 능력에 따른 재화 배분이란 원리는 봉건 신분제에 비하면 진보적이고 자본주의와 친화적이다. 능력은 객관적 지표(시험)로 측정될 수 있다. 이만하면 ‘공정’하고, 진로는 정해졌다. ‘능력주의의, 능력주의에 의한, 능력주의를 위한 사회’의 실현!

 최근 등록된 고위 법관 144명의 평균 재산은 38억여 원으로, 통계청 발표의 2021년 3월말 기준 일반 가구당 평균자산 5억여 원, 평균 순자산 4억여 원에 비해 월등히 높다. 2020년 21대 총선,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이 46명으로 전체의 15.3%에 해당된다. 단순화하면, 국민 0.06%의 법조인이 국민 대의기관의 15.3%를 차지한 셈이다. 이번 대선도 법조인후보들의 대결이었다. 법조인은 특수 이해를 초월해 국민을 대표할 ‘공정’한 능력도 가진 것일까?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최근 한국은 ‘선진국’으로 국제관계 핵심부로 진입했고, 걸맞게 매력적 문화상품도 활발히 생산한다. 우리는 BTS의 뼈를 깎아 이룬 놀라운 성공에 열광하고, <오징어 게임>을 보며 ‘공정’을 소비한다. 이 변화와 발전은 많은 부분이 ‘능력주의’ 소산일 것이다.

 그러나 60여 년 전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meritocracy)’란 단어를 처음 썼을 때부터 그 위험은 예고되었다. 개인의 ‘측정 가능한 능력’에 따라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영국사회를 풍자적으로 가리키는 ‘능력주의’가 미국, 프랑스는 물론 한국의 풍속도가 된 지 오래다.

 박권일은 ‘능력주의’를 ‘능력에 따라 제대로 차별해 달라’는 요구로 본다. 지배자들이 권력을 전유할 타고난 능력이 있다는 맹목적 ‘믿음’을 의심하는 데에서 민주주의는 출발했지만, 어느새 특정한 능력의 엘리트 지배가 특정 시공간에서만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엘리트 지배의 일시적 효율성은 항구적 정당성으로 고착된다 『한국의 능력주의』. 피에르 브르디외는 가정 · 교육을 통해 전수되는 상징자본(능력)이 프랑스 사회의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고 억압과 지배로 작용하는 현장에 대한 분석을 담은 『재생산』, 『구별짓기』 등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미국 역시 하버드대를 정점으로 한 ‘능력주의’ 폐해가 심각하다며, 샌델은 하버드대 입학을 위한 제비뽑기를 제안한다.


‘능력주의’와 ‘서열주의’의 관계
 ‘능력주의’로 형성된 서열은 ‘서열주의’로 구조화, 내면화된다. 학교, 기업, 관료 등 사회 전반으로, 개인 내면 깊숙이 자리매김했다. 아찔한 수직 체계 속 한 치라도 더 높은 자리를 점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로 규정받고 이를 실천한다. 서열을 향한 무한경쟁이 벌어진다. 오찬호는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 찍힌 대학생들이 사회적 차별을 수긍하고 이에 가담하는 쓸쓸한 풍경을 보여준다(『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서울과 지방, 토착민과 이주민 등 이어지는 서열화는 우리의 일상이다. 지구정치적으로, 국제서열 1위의 미국을 선망하고, 이에 의존하고, 이를 닮으려고 애쓰는 우리의 정치심리학은 이 ‘서열주의’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을까? 이 ‘서열주의’ 성채 안에서 우리는 육아 전쟁, 입시 전쟁, 고시 전쟁, 수주 전쟁, 성별 전쟁 등 수 많은 전투에 참여하며 에너지와 인간성을 소진하고 있다. 여기에 ‘공공성’이 자리할 여유는 없다.
 

 ‘능력주의’의 실천 및 유지 동력, ‘가족이기주의’
 전지구적으로 유사한 상황이나, 한국은 더 혹독한 면도 보인다. 김동춘을 통해 ‘능력주의’가 융성한 우리의 토양을 파헤쳐 들어갈 수 있다. 사회관계와 정신세계의 중심에 가족관계가 있다. 동서양 문명권에서 가족이 매우 중요한 사회단위이나, ‘가족주의’의 가장 중요한 표출인 근대 이후 교육열은 한국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식민지적 근대화, 한국전쟁, 급속한 산업화의 격동기 속에서 생존과 보호, 상승과 지위 유지를 위한 전략으로 ‘가족주의’의 생성과 변형과 구조화를 보여주고, 그 무(無)도덕성과 이기주의를 지적한다(『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

 근현대사의 경험과 적응 과정은 공적 존재로서의 의식과 활동을 중지시켰고, 각자도생할 것을 강박했다. 의지할 것은 ‘가족’과 그 지원하의 ‘교육’, 이를 발판으로 한 지위 상승의 실현이었다. 이 실천은 공적 의제와의 절연이자 공공도덕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했다. 이는 ‘능력주의’ 동전의 이면을 이룬다.


‘가족이기주의’, ‘능력주의’, ‘서열주의’의 폐해
 맹렬한 상승 열망과 결합한 우리의 ‘능력주의’는 30여 년의 고도성장이란 큰 성과를 가져왔으나, 공적 지향을 축소하고, 공인된 경쟁절차만 통과하면 큰 보상을 주고, ‘서열’을 잘 타고 오르면 후속 업적 · 급부 없이 더 큰 보상과 불로소득(지대)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유사 가족적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장으로도 작용했다. 법조인은 이 ‘가족’, ‘능력’, ‘서열’ 주의의 열렬한 실천자이자 담지자였고, 특히 구(舊)사법시험을 통해 배출된 고위직 법조인들이 그 폐해의 중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정 지위를 따 내거나 회피하기 위한 무한경쟁은 큰 짐이었고 극심한 불안으로 작용했다. ‘죽을 각오로 일하라’는 말이 공공연히 유통되며 실제 과로로 죽는 이가 적지 않다.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인구는 늘고 있다. ‘능력’의 나르시시즘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할 수 있고, 이로 인한 부정적 외부효과가 사회로 전가된다.  ‘능력주의’의 ‘믿음(신앙)’과 실천은 넘쳐나되, 사회적 ‘신뢰’가 밑바닥인 이유와 ‘무엇을 위한 능력주의인지’를 돌아볼 시점이 왔다.

 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부터 삼킨다. 약자에게 치명적이고, 그 지위는 세습되는 경향을 보인다. 더 잃을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과도한 ‘능력주의’의 시각을 견지하면 이 비참함을 개인의 ‘선택’으로 보게 된다. 이는 또 다른 ‘선택’을 야기한다. 가족을 유지할 비용이 급증하자 구 가족은 해체되고 신 가족의 형성과 출산은 포기된다. 이주노동자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


‘공익’을 수반하는 ‘공정’의 가능성?
 불교는 인생을 ‘고(苦)의 바다’로 본다. 이를 넘어설 방법론으로 욕망의 제거를 든다. 현실은 우리의 고(苦)가 능력과 자원(돈)의 결여에서 온다고 속삭인다. 결여된 자에게서 제거할 욕망을 찾을 수나 있을까? 능력과 보상을 쥔 자가 스스로 놓을 수 있을까? 조건의 변화 없이 보편적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모두 ‘능력’을 벗어난 질문들이다. 다만, 실질적 개인의 자유(능력) 보장을 위해 사회(공공성)를 지킨다는 북유럽의 실천을 살피며 사회조건의 상이점들을 확인해 볼 뿐이다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아누 파르타넨 저).

 무섭게 대두하는 기후, 지구정치, 노동, 불평등, 인구구조 위기에 ‘공공’의 회복이 없다면 대응의 실마리조차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미래는 ‘3.8선’이란 물적 · 심리적 구조물의 청산과 함께, 한계에 직면한 계몽주의 이성에조차도 도달치 못한 약한 자아들의 성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정부적 국민국가체제하의 끊임없는 전쟁정치와 ‘능력’의 자제를 절실하게 요구하는 기후위기의 국면은 ‘공정’이란 기호에 치명적 메시지를 부여할 듯하다.

양동운 변호사
● 법무법인 남산

양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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